[문화칼럼] 물 한 잔 주는 것도 방생이다

입력 2013-07-19 10:47:29

방생(放生)을 다녀왔다. 백일기도를 마치고 신도들과 함께 바닷가에 가서 간단한 의식을 한 후 물고기를 각자 한 자루씩 풀어주었다. 인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물고기들은 말 그대로 '물을 만난 물고기'들처럼 재빨리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불교에서 금지하는 계율의 첫 번째는 산 생명을 죽이는 것이고, 공덕을 짓는 으뜸 행위로 방생을 꼽는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미물이든, 모든 생명은 자신의 목숨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어서 죽음 직전에 풀려난 생명의 입장에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옛날에 한 사미가 고승의 제자가 되었다. 도력이 높은 스승은 그 사미가 일주일 후 죽을 것을 알고 매우 안타까워하며 사미에게 말했다. "얘야, 어머니 뵌 지가 오래됐지? 집에 가서 어머니 뵙고 8일 후에 다시 오너라."

스승은 사미가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보고 죽었으면 하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8일 후에 사미가 절로 돌아왔는데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스승이 물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일주일 안에 죽을 인연이어서 보냈는데, 이렇게 다시 돌아왔구나. 그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사미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고승이 좌정하고 삼매에 들어가니 곧 그 까닭을 알 수가 있었다. 스승이 다시 물었다. "네가 가는 길에 많은 개미를 구해주었느냐?"

그제야 생각난 사미가 대답했다. "네, 집에 가는 도중에 많은 개미가 물에 갇혀 있어서 막대기로 물길을 돌려주었습니다."

"음, 그랬구나. 방생을 하면 반드시 장수하게 된다. 옛날 큰스님 말씀에 생명 하나를 구하면 칠층탑 하나를 쌓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너는 무수한 생명을 건졌으니 오래 살 것이고 장래에 복도 많을 것이다. 너는 앞으로 계속 방생을 하고 중생을 이롭게 할 뿐 아니라 중생들에게도 살생을 금하고 방생을 권해서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도록 해라."

연지 대사의 '방생행복 살생불행'이라는 책에 실린 이야기인데, 그 후 사미는 스승의 당부를 잘 지켜 고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가 절집에서는 영험록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전래되고 있다.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믿고 그러한 행위를 오랜 세월 동안 실천해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방생의 의미는 속박되어 있는 생명체를 놓아주어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물고기나 자라, 새, 노루를 방생하는 것은 방생 가운데 일부에 해당된다.

방생의 대상에는 사람도 포함된다. 사람들을 옥죄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소외의 그늘에서 외로워하는 이웃에게 따스한 관심을 보이는 것도 방생이다. 이웃돕기를 하거나 복지시설을 방문하여 위로하는 것을 인간 방생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병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치료해 주는 것, 폭력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도 방생이다. 오늘처럼 더운 날 목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 잔 주는 것도, 땀을 뻘뻘 흘리며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사람에게 길을 일러주는 것도 방생이다. 크고 작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모든 것이 해당된다.

방생은 해탈(解脫)과도 통한다. 중생은 미혹하여 악업을 짓고 그 악업이 씨앗이 되어 고통을 받는다. 그렇게 육도를 윤회하며 탄생과 죽음을 끝없이 반복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안락의 세계인 열반(涅槃)에 드는 것이 불교의 목표인데, 자신을 해탈하게 하는 마음 수행도 방생으로 꼽을 수 있다.

더 확장하면, 유한한 지구의 자원을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을 개선하는 것, 전쟁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것, 인간 중심의 이기심을 부정하는 것도 방생이다.

"방생은 결국 고통에 관한 문제이다.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이웃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한북/보성선원 주지 hanbook108@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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