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칼럼] 대통령님, 한마디면 됩니다

입력 2013-07-15 07:01:05

박근혜 대통령님께.

대통령님이 1998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일 겁니다.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근처 한 식당에서 정치부 기자로서 처음 인사를 드린 기억이 생생합니다.

무슨 말을 할까? 무엇을 물어볼까? 많은 고민을 하고 긴장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정치인을 만나는 것이 본업인데도 그날따라 무덤덤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님을 다른 국회의원과 다르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대통령의 딸이라는 포스를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길지 않은 점심이었지만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받은 느낌은 대통령님이 과연 정치인으로 대성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너무 연약해 보이는 외모, 크지 않은 목소리, 정치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도 대통령님을 여러 정치 현장에서 만났습니다. 그때마다 대통령님이 보여주는 모습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대통령님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제 판단이 결국 옳지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의연함, 누구 앞에서라도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는 용기, 말한 것은 꼭 실천하고야 마는 신뢰는 다른 정치 지도자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없는 덕목이었습니다. 확실한 차별화가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통령님을 떠올리면 몇 개의 단어가 먼저 떠오릅니다. 바로 신뢰, 원칙, 약속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대통령님이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얻고 선진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정치 문화를 만드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했던 말을 저는 또렷이 기억합니다. 지난해 4'11 총선을 승리로 이끈 직후에도 대통령님은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렸던 모든 것을 반드시 실천에 옮기겠다"고 했습니다. 또 지난해 12월 19일 밤 감격적인 대선 승리를 확정 지은 뒤에도 "약속을 반드시 실천하는 민생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고 또 "민생 대통령, 약속 대통령, 대통합 대통령이 되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은 실천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안 했으면 몰라도, 했다면 지켜야 합니다. 그것도 제때에 지켜야 합니다. 때를 놓치면 그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면 안 되는 약속이라면 먼저 해야 합니다.

지방선거의 정당 공천 폐지와 관련된 약속도 그렇습니다. 대통령님은 지난해 대선 직전 "기초의원과 기초자치단체장에 대한 정당공천제 폐지를 통해 기초의회와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치의 간섭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지방정치를 펼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여러 장소에서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지방선거 투표일은 이제 1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내년 지방선거는 대통령님 임기 중에 한 번밖에 실시되지 않는 선거입니다.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내년 선거에서 정당 공천이 유지된다면 대통령님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대통령이 된다는 말입니다.

대통령님은 세종시특별법 파동이 있을 때 '정치적 생명을 걸고' 현직 대통령과 맞서서 오늘의 세종특별자치시를 탄생시키지 않았습니까? 그것 역시 대통령님이 정치적 약속을 지킨 결과입니다. 세종시 문제도 국가 대사였습니다만 기초단위 지방선거의 정당 공천 폐지 문제는 그보다 몇십 배 몇백 배 더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성패가 달린 일입니다. 서울이 좌지우지하는 위임 자치가 아니라 진짜 지방자치를 시작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대통령님.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한 새누리당 국회의원들 일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들어 미적미적거립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대통령님 처럼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몇몇은 자기들 밥그릇을 빼앗아 간다고 아우성입니다. 큰일입니다. 또 야당과의 정쟁을 이유로 들지도 모릅니다. 내년 6월 선거일에서 거꾸로 계산을 해보면 지금이 아니면 늦어버립니다.

다만 다행스러운 점은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대통령님의 전화 한 통이면 고개를 숙일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을 향해 이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국민과의 약속인데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