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캠프에 엄마·아빠 대신 할머니·할아버지
'두벌자식이 더 곱다'는 말이 있다. 손주가 아들보다 더 귀엽다는 뜻의 북한 속담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자식보다 예쁜 게 손주'라거나 '아들 사랑보다도 손자 사랑이 더하다'는 말이 흔히 쓰인다.
할아버지'할머니의 손주 사랑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 3대 이상의 직계가 한 집에 모여 살던 대가족 시대에 장손은 으레 제일 웃어른인 할아버지와 겸상이었고, 유아기의 손자는 할아버지와 한 방에서 기거했다. 손주를 귀여워하지 않는 조부모는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최근에는 손자'손녀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진 '손주 바보' 조부모가 더욱 늘고 있다. 출산율 저하로 집집마다 아이들이 귀해진데다 맞벌이가 대세를 이루면서 조부모가 손주를 돌봐주는 '황혼 육아'가 증가한 영향이다.
◆할아버지가 쓰는 육아일기
대구 출신으로 25년간 100여 권의 책을 낸 전문번역가인 이창식(64) 씨는 최근 색다른 책을 한 권 냈다. 자신이 저자(著者)가 된 것도 처음이지만 '할아버지의 육아일기'란 점이 더욱 눈길을 끈다. 육아 서적은 시중에 흔하지만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가 쓴 육아서는 아직 생소하다.
이 씨가 펴낸 '하찌의 육아일기'는 아이와 할머니'할아버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수필처럼 썼다. '하찌'는 외손자가 할아버지를 부르는 호칭.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맞벌이 부부인 딸 내외의 사정을 보다 못한 아내가 외손자를 맡기로 하면서부터다.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떨어져 살던 딸 내외가 아침 출근길에 재영이(외손자)를 맡기면 퇴근하면서 다시 데려갈 때까지 돌봐주는 생활을 1년 넘게 했다.
손주를 대신 키워주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밥 먹이는 일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육아 경험이 부족한 이 씨는 상대적으로 쉬운(?) 동요'자장가 불러주기,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 놀기 등을 맡았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식을 직접 기를 때보다 훨씬 재미있었다는 게 이 씨의 회고다. 이 씨는 "딸을 키울 때는 젊었던 터라 솔직히 다른 세상 일에 호기심을 많이 빼앗겼다"며 "지금은 손자 녀석밖에 보이는 게 없다"고 털어놓았다.
의견 충돌도 없지는 않았다. 귀엽다고 손주에게 사탕을 주려고 하면 아내와 딸은 건강에 좋지 않다며 극력 반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딸 내외와의 상호 이해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자신들이 낳은 자식을 부모가 대신 키우며 고생하는 걸 보면서 딸'사위가 미안해하고,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이 씨는 "손자를 키우면 진은 좀 빠지지만 절대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외손자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돼 품을 떠났을 때는 갑자기 실업자가 된 느낌이었다"고 했다. 또 "처음부터 육아일기를 책으로 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손자를 위한 선물로는 훌륭한 것 같아 흡족하다"며 "손자 재롱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키웠는지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한 번 만났을 때 마음 터놓고 대화해야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를 짝사랑해야 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최근 TV에 자주 등장하는 한 광고에서도 할아버지는 손주에게 비참하게 외면당한다. '같이 살자'는 할아버지의 애원에 아이는 '할아버지 집에는 뽀로로가 안 나오잖아!'라며 매몰차게 돌아서고, 할아버지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은퇴한 시니어들은 가장 하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로 '손주와 함께 여행하기'를 많이 꼽는다. 하지만 뜻대로 이뤄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손주와 지속적으로 교감을 해야만 가능한 기회다.
그래서 최근에는 '조부모'손주관계 전문가'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해 발표한 '10년 후 미래 유망직업'에는 '새롭게 부상할 직업' 17가지에 이 직업이 포함됐다. 넓은 범위의 인간관계 전문가 가운데 하나로, 고령자와 젊은 사람 간 세대 갈등을 완화하도록 조정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영국에는 실제로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은 고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국가이기 때문에 연령적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재테크만큼이나 가족 사랑도 공부가 필요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손(祖孫) 간 공감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그러나 핵가족 시대에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대신 한 번 만났을 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종진 국회의원(대구 달성)이 손주 6명과 매년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는 것도 그래서다. 슬하의 1남(미혼) 4녀가 서울'대전'구미'원주 등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바람에 서로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이 의원은 "내가 생각하는 만큼 손주들이 반갑게 맞이해주지는 않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소집령을 내린다"며 "은퇴 후 등산이나 독서 등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실버세대가 손주와 짧은 여행이라도 함께하면 새로운 생활을 발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우리투자증권의 100세 시대 연구소가 지난해 연 '가족사랑 세대 공감 캠프'도 참가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45가정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와 함께하는 가족 공동체험 프로그램이었다. 대부분의 참가자는 집이 아닌 곳에서 손주와 1박 2일을 함께 보내는 게 처음이었지만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는 손주와 친해지는 계기가 돼 아주 좋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함께 노래 부르고 퀴즈게임을 하는 동안 서로 눈높이를 맞추게 됐다는 것이다.
연구소 한창용 대리는 "가족 간 소통의 부재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고 세대 간 격차를 줄여보자는 취지에서 행사를 기획했다"며 "행복하고 활기찬 100세 시대는 경제적인 노후대책뿐 아니라 건강한 가족애가 필요하다"고 했다.
◆'6포켓 1마우스' 확산 따라 마케팅도 활발
남들이 자신을 할아버지'할머니라고 부르면 화가 나도 손주들이 부르면 부를수록 기뻐지기 마련이다. 가끔 손주가 다정한 눈길을 보내오면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갑을 열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다. '손주 바보' 할아버지'할머니가 늘어나면서 덩달아 관련 마케팅이 활기를 띠는 이유다.
교보생명은 보험에 가입한 조부모가 사망할 경우 손자'손녀에게 매년 생일축하금을 보내주는 '손주사랑보험'을 최근 내놓아 주목받았다. 생전에는 조부모의 자필이 담긴 사랑의 카드를 발송해주는 '가족사랑 메신저 서비스'를 제공한다. 조부모는 생전에 손주들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면서 애틋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손주들은 생일마다 할머니'할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반응도 좋아 출시 한 달 만에 가입자가 1만 명을 넘었다는 게 업체 측의 설명이다. 교보생명 홍보팀 직원은 "경제적 안정이라는 일반적 보험 목적과 달리 가족 간에 사랑과 추억을 전해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며 "스토리텔링 상품이라는 독창성을 인정받아 생명보험협회로부터 배타적 사용권을 획득했다"고 소개했다.
구매력을 갖춘 실버계층의 소비가 늘면서 백화점의 유'아동 매장 매출도 덩달아 상승하고 있다. 이른바 '6포켓 1마우스'(6 pocket 1 mouth) 현상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하나뿐인 아이에게 소비를 집중하는 것을 가리킨다. 백화점 수입 아동복 코너에서는 손주들에게 한 벌에 수십만원 이상 하는 옷을 선물하려는 노년층 고객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구백화점 CRM(고객관계관리)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멤버십 전체 회원 중 60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6.7%. 그러나 이 회원들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5%에 이른다. 특히 VIP 고객인 '애플 클럽' 회원의 경우 전체 회원 가운데 60대 이상 회원이 20%나 된다.
대구백화점 홍보팀 이준혁 대리는 "60대 이상 고객층은 연령층 가운데 평균 객단가가 가장 높다"며 "실버세대들이 손자, 손녀를 위한 구매가 늘어나면서 키즈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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