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한 선이 면이 되고, 그 면적이 곧 우주가 되죠"

입력 2013-06-25 07:16:39

한국 추상 1세대 정상화 화백 기획전

한국 추상 1세대 작가 정상화의 전시가 우손갤러리 기획으로 9월 7일까지 열린다.
한국 추상 1세대 작가 정상화의 전시가 우손갤러리 기획으로 9월 7일까지 열린다.

"제 작품은 추상화 같지만, 실은 극사실적인 작가 정신을 축약시킨 것이죠. 60년 이상 작업하면서 지켜온 저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한국 추상 1세대 작가 정상화의 전시가 우손갤러리 기획으로 9월 7일까지 열린다.

20일 우손갤러리에서 만난 정 화백은 83세의 고령에도 예술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젊은이보다 더한 열정 어린 눈빛을 보였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68년, 그리고 같은 방식의 작업을 한 지 40여 년. 그래서일까. 정 화백의 작품 앞에 서면 묵직한 감동이 서서히 밀려든다. 물감이 만들어낸 수많은 선, 면, 그리고 공간들은 빛으로 반짝인다. 40년간 한 작가가 매일 같은 방식으로 노동하며 만들어낸 이 작품은 인간과 시간이 만들어낸 결정체이다.

정 화백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독특한 작업 방식을 먼저 알아야 한다.

먼저 캔버스 표면에 고령토를 물과 섞어 캔버스 전체에 3㎜ 두께로 고루 펴 바르고, 그것이 적당히 마르면 캔버스 천을 나무틀에서 떼어낸다. 작가는 캔버스 천 뒷면에 자를 대고 연필로 가로, 세로의 규칙적인 선을 그어, 캔버스의 접을 선을 미리 계획한다. 그리고 그 선을 따라 캔버스를 접는다. 캔버스를 접었다가 펼치면 고령토 위로 수많은 균열이 생기고, 작가는 캔버스를 나무틀에 다시 고정한 후 이를 한 조각씩 떼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떼어낸 빈자리에 아크릴 물감으로 메운다. 이와 같은 작업을 5, 6번 반복하게 되면, 캔버스 위로 마치 균열된 것과 같은 물감의 덩어리가 나타난다.

이와 같은 작업을 정 화백은 40여 년간 매일 규칙적으로 하고 있다. 요즘에도 오전 9시부터 자정, 잠들기 전까지 마치 노동처럼 작업에 몰두한다. 그에게 과연 작품이란 무엇일까.

"제 철학은 절대적으로 작품 제작 프로세스에 있어요. 과정 자체에 철학이 녹아있는 것이죠. 그래서 방법이 중요하진 않아요. 40년간 같은 작업을 해왔지만 어느 한순간 즐겁지 않은 때가 없었죠. 비슷한 것을 반복하고, 반복하다 보니 벌써 여기까지 온 기분이랄까요."

그의 작품 위로 한 사람이 삶을 다 바쳐 시간을 들이고 노동한 그 결과물이 오롯이 드러난다. 그는 '선, 면, 공간'이 발생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작업하면서 만들어지는 선이 면이 되고, 그 면적이 곧 우주가 된다는 것. 그의 깊은 철학이 작업 과정에 깃들어 있다. 그는 여전히 길 위에서 무언가를 찾아가고 있다.

"한 작업을 마치면 그다음 작업을 위한 보배 같은 핵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그게 다음 작업을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요. 아직도 제 마음에 차지 않아요."

정 화백은 한국, 프랑스,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지금은 곤지암 작업장에서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작품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의무감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나조차 모르겠어요. 68년 그림을 그려오면서 '내 그림을 단 한 사람만 알아주면 된다'는 생각이 제게 힘이 됐죠. 제 작업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과 더불어 내 작품세계가 마무리되는 게 아닐까요."

그는 인터뷰 중에 '작품 하는 사람이 눈물과 아픔이 없으면 안 된다. 눈물과 아픔으로 작업하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고 젊은 작가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요즘 유행처럼 아이디어만을 차용하는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그동안 정 화백의 작품은 '단색화', '미니멀리즘' 등으로 오해받아왔다. 그의 작품 속 사각형은 같아 보이지만 그 어느 하나같은 사각형이 없고, 또한 한 작품 안에서도 같은 색이 없다는 것이 정 화백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단색화가 될 수는 없다. 개인의 특성을 삭제하고 오로지 물성만 드러내는 미국의 미니멀리즘과도 큰 차이가 있다.

한국 작가로 첫 기획전 작가로 정 화백을 선택한 우손갤러리 김은아 대표는 "하루도 쉬지 않고 규칙적으로 활동해왔기에 초기 작품과 최근작이 균질한 보기 드문 작가"라면서 "선생님의 열정이 작품에 녹아 있기에 그 작품세계를 재조명하고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정 화백은 관객들에게도 조언했다.

"작품을 금방 알려 하지 말고, 되풀이해서 보세요. 한 작품을 오랫동안 되풀이해서 보면, 알게 되고 비로소 보입니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