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편지] 삼각팬티 입은 의사

입력 2013-06-24 08:00:00

정말 오랜만에 아이들 입시 때문에 미뤄두었던 해외여행을 떠났다. 아름다운 물고기, 산호, 그리고 물밑에 허우적대는 사람들 구경에 한참 정신이 팔려 있는데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응급 환자가 생겼으니 빨리 배로 올라오세요."

환자 가족들은 울며 고함치고, 가이드들은 다급하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환자는 효도관광을 온 남자였다. 맥박도 없었고, 숨도 쉬지 않았으며 얼굴에 청색증까지 나타난 상태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고혈압이 있었는데 약은 먹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고혈압에다 파도가 높은 바다에서 너무 긴장해 심장에 부담을 준 것 같았다. 사람들이 환자 팔다리를 주무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데 그들을 제치며 고함쳤다. "잠깐만요. 나 의사입니다." 아! 직접 심폐소생술을 해 본 것이 언제였던가?

병원에선 대부분 전공의들이 직접 심폐소생술을 한다. 대부분 옆에서 지휘만 하다 보니 직접 심폐소생술을 해본 지가 까마득하다. 하지만, 한 번 익힌 기술이 어디 가겠는가? 감각은 여전히 몸에 배어 있어 급박한 순간이 닥쳤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호흡과 맥박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환자의 입을 벌려 이물질을 제거한 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코를 잡고 힘차게 입으로 호흡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심장을 세게 두세 번 내려치고 심장마사지를 시작했다.

우리가 탄 작은 필리핀 전통 배는 육지를 향해 높은 파도를 이기면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배의 흔들림이 심했지만, 심폐소생술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됐다. 간간이 환자 상태를 살폈으나 호전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앰뷸런스가 도착하고 인공호흡을 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여기서 내 역할이 끝났나 싶었는데 환자의 가족과 현지 응급구조사가 병원까지 같이 동승하면서 치료를 계속해 주기를 원했다. 겨우겨우 응급실에 도착했다.

응급실 의사들에게 그간 상황을 설명하고 나오는데 복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나 자신을 돌아보니 다들 쳐다볼 만도 했다. 아무리 더운 나라이고, 웃옷을 벗고다니는 사람도 많지만, 외국인이, 그것도 맨발에다가 볼록한 배에 조그마한 삼각 수영복만 달랑 걸친 채 병원 복도에 나타났으니 신기한 구경거리가 난 것이다. 머쓱한 마음에 그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영어로 "미안합니다. 응급환자입니다"라며 황망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일상의 번잡함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재충전을 위해 온 여행지에서조차 나는 의사일 수밖에 없었고, 내가 의사이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흰 가운 대신 삼각팬티만 하나 걸쳤을 뿐이지만.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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