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곧 학교" 지자체 교육에 눈뜨다
그동안 청소년들의 교육은 온전히 학교의 몫이었다. 인성 교육, 대학 진학, 학교폭력 등 각종 과제를 풀어나갈 책임도 학교에 지워졌다. 공부가 부족하다 싶으면 사설 학원에 기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지자체가 나서 학교와 함께 청소년을 키우자는 움직임이 서울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마을이 곧 학교다' '한 아이를 제대로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마을 교육 공동체 사업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이 됐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아직 청소년 교육에 대한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학교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는 대구 수성구청의 움직임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수성구청소년수련원과 연계한 생태'진로 체험 프로그램
이달 11일 오전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 진밭골 수성구청소년수련원. 범일중학교 배드민턴 동아리 소속 학생 40여 명이 수련원 뒤로 나 있는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전나무 등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생태 체험에 나선 일행을 이끄는 이는 생태교육연구소 이길성 수석 연구원. 그는 학생들에게 각종 풀 이름과 특징을 설명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알려줬다.
"풀 중에는 인체에 위험한 것도 꽤 있어. 미치광이풀이 대표적인 것이지. 이 풀을 먹을 경우 근육에 힘이 안 들어가게 돼. 씹어 먹다 얼굴 근육이 풀려 버리면 어떻게 될까? 입을 못 다물게 돼 침이 질질 흐를 거야."
학생들은 이 말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산딸기를 찾아 맛을 보라던 이 연구원이 또 한 마디를 던졌다. "맛있다고 모두 따먹진 마라. 열매는 번식에도 필요하니까. 다 먹어 버리면 내년에 이 자리에서 산딸기를 볼 수 없게 될 거야. 숲의 주인은 나무와 풀들이니 손님인 우리가 조심해서 행동해야겠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산길을 지나다 멈춰 선 이 연구원이 풀을 뜯더니 맛을 보고 싶은 학생은 나오라고 했다. 손을 든 학생은 신언수(2학년) 군. 이 연구원은 괭이밥이라며 신 군의 입에 풀을 넣어준 뒤 맛을 물었다. "새콤해요. 떫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네요. 평소 식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여러 가지 정보들을 알게 돼 재미있어요."
이날 생태체험은 수성구청 산하 수성구 창의적체험활동지원센터가 마련했다. 이곳은 올해 2월 문을 연 수성구청소년수련원과 연계, 원하는 학교의 신청을 받아 생태'진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프로그램 참여 학생들은 오전에 생태 체험을 한 뒤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엔 진로 검사를 하고 관련 특강을 듣고 있다.
수성구 창의적체험활동지원센터 관계자는 "학교의 부담을 덜어주고 학생들의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라며 "앞으로 지역 학교,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운영할 것"이라고 했다.
◆고교 학술 동아리 지원 프로그램 운영
대륜고등학교는 지난달 중순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7시부터 2시간 동안 경영경제, 생명과학, 물리 분야 심화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일반 고교에서 다루는 학습 내용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학습 및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성적이 뛰어난 중학생들을 직접 선발하는 자율형 사립고나 특수목적고에선 흔한 풍경이지만, 일반고에서는 지도 인력 확보, 학생 수준, 운영 비용 등 여러 걸림돌이 있어 흔치 않은 모습이다.
대륜고 경우 일반고지만 우수 학생이 많아 심화 학습에 대한 수요가 많다. 문제는 지도 인력 확보와 프로그램 구성. 대륜고는 수성구 창의적체험활동지원센터가 진행하는 학술 동아리 지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 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다.
수성구 창의적체험활동지원센터 측은 "모두 6회 수업을 할 예정인데 1회 수업은 2시간씩 진행한다"며 "경북대 박사 출신 강사들을 섭외, 학생들이 이론과 연구 수업을 들으면서 논문 작성법까지 익히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이 프로그램을 수강 중인 학생은 약 80여 명. 학생들의 만족도도 높다.
경제 동아리 'ECON' 소속인 박범석(2학년) 군은 수업을 듣고 논문을 써보는 것이 흥미롭다고 했다. "주제 선정 방법, 조사 방법, 작성 방법 등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자세히 배울 수 있어 재미있어요. 처음엔 무엇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 막막했는데 이제 조금은 길이 보이는 느낌이에요."
생명과학동아리 'EX' 소속인 윤홍준(2학년) 군도 이 프로그램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이 있는 내용을 배울 수 있어 좋아요. 또 대학 교수님의 강의도 들어볼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앞으로 대학에 가서 듣게 될 수업에 대한 기대감도 더 커졌고요. 목표로 한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겁니다."
대륜고 교무부장인 김동현 교사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이 희망 진로 분야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됐다는 점이 좋다고 전했다. 김 교사는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고 대학에서 공부할 전공을 선택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깊이 있는 내용을 공부하고 논문을 써보면서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 과학적 탐구 능력,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도 키울 수 있어 만족스럽다"고 했다.
◆희망 나눔 봉사학교 프로그램 운영
고교생들이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기 위한 여건은 좋은 편이 아니다. 대학입시 준비로 시간을 내기 쉽지 않고, 봉사 활동 의지가 있어도 활동 장소를 구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교내 청소나 학교 행사 지원 등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다. 정화여자고등학교는 수성구청의 적극적인 협조로 활동 장소 문제를 해결했다.
수성구청에 따르면 정화여고가 확보한 봉사 활동 장소는 모두 78곳. 유치원, 어린이집, 지역아동센터, 복지관, 요양원, 경로당 등 유형도 다양하다. 5월 초 정화여고가 수성구청과 협약을 맺고 '희망 나눔 봉사학교' 프로그램에 발을 디딘 덕분에 연계할 수 있게 된 곳들이다.
봉사 활동은 동아리별로 펼치고 있다. 매월 둘째, 넷째 주 금요일 오후 시간에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참여하는 동아리 수는 모두 23개, 참여 학생은 600명을 웃돈다. 1, 2학년 학생 대부분이 참여하는 셈이다.
학생들은 봉사 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수성구 범물2동 경로당을 찾아 안마, 말동무 봉사를 하고 있는 댄스동아리 'STEP' 소속 박혜주(2학년) 양은 "할아버지, 할머니들 앞에서 평소 연습한 춤을 보여 드렸는데 매우 기뻐하셔서 뿌듯했다"고 했다.
화학동아리 'CHEMtree' 회원인 김미진(1학년) 양은 "어린이집이나 지역아동센터를 찾아 아이들에게 화학 실험을 보여 주고 공부도 도와주는데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낀다"며 "장래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데도 이 경험은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화여고 측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봉사 활동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프로그램의 장점으로 꼽았다. 정화여고 교육특색사업부장인 장지호 교사는 "자칫 봉사 활동이 시간 때우기에 그치기 쉬운데 수성구청이 적극적으로 나서 봉사 활동 장소를 섭외해준 덕분에 봉사 활동을 제대로 펼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수성구청 평생교육과 관계자는 "지자체로서도 지역 발전을 이끌 인재를 키우는 데 힘을 보탤 필요가 있다"며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이 지역 상황을 이해하고 공동체 의식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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