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주꾸미 먹통 라면

입력 2013-06-13 14:33:00

밥알 같은 주꾸미 알, 먹물로 끓인 라면 '별미 중 별미'

연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 가짜 박사 사건'의 후견인이었던 청와대 고위 관료는 정아를 '쩡아'라고 불렀다. 그가 쓴 신문에 공개된 연애 편지를 읽어 본 적이 있다. 정아보다는 '쩡아'라고 불러야 애정의 도수가 더 깊고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요즘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싸랑해'란 된소리 발음은 그만큼 필링이 좋다는 얘기다.

갯가 사람들은 물론 뭍의 사람들까지 봄철 미각의 총아인 주꾸미를 '쭈꾸미'라고 부른다. 한글 학자와 국어 교사들은 문법을 가르칠 때만 주꾸미로 발음하고 어시장에 가서는 그들도 "쭈꾸미 1㎏에 얼맙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번 '짜장면'이 표준어로 올라설 때 '쭈꾸미'도 함께 승단 심사를 봤더라면 단증을 받고 검은 띠를 맸을 텐데 좋은 기회를 놓쳤네 그려.

소설가 이병주는 장편 소설 '지리산'의 첫머리에 '지이산(智異山)이라 쓰고 지리산이라 읽는다'고 썼다. 나는 주꾸미라 쓰고 '쭈꾸미'라고 읽는다. 낙지 과에 속하는 주꾸미는 낙지의 아들뻘이다. 생김새는 문어를 닮아 다리 여덟 개에 빨판을 달고 있지만 크기로 보면 문어의 증손자 자리를 차지하기도 쉽지 않다. 오징어와 호래기는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호래기가 오징어를 따라잡지는 못한다. 이들은 다리를 열 개나 달고 있지만 문어와 낙지에 비하면 생태 습성은 전혀 다르다. 이들 사이를 굳이 촌수로 따지면 성씨가 다른 내외종 간쯤 되려나 잘 모르겠다.

봄 주꾸미 맛은 가히 일품이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란 말이 '자나 깨나 불조심'이란 표어처럼 널리 알려져 있지만 봄철 주꾸미 맛에 입맛을 들인 사람들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며 손사래를 친다. 머리통 속에 박혀 있는 흰 쌀밥 같은 주꾸미 알 한 숟가락을 입 안에 넣어보면 그저 기가 막힐 뿐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전어 굽는 냄새처럼 주꾸미 알 맛을 냄새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죽은 시어머니까지 돌아올 판이다.

주꾸미 머리통은 끓는 냄비 속에 집어넣고 삶아 먹어야 제격이다. 접시에 달라붙은 다리는 나무젓가락으로 실랑이를 해 가며 집어 올려 날것으로 먹어야 제 맛이다. 그걸 참기름 부은 굵은 소금에 찍어 먹으면 입에 짝짝 붙는다. 이때 도수 높은 소주 한 잔을 소스를 끼얹듯 입안에 확 뿌리면 혀와 위의 장단은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 그야말로 멋진 앙상블을 이룬다. 주꾸미 예찬자들은 '날것의 달콤하기는 낙지보다 낫고 삶은 것은 부드러우면서 쫄깃쫄깃하기가 문어보다 낫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들 역시 한결같이 주꾸미라고 부르지 않고 '쭈꾸미'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는 '쭈꾸미 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낙지와 주꾸미를 상당히 늦게 만난 편이다. 시방도 그렇지만 낙지와 주꾸미는 음식깨나 즐길 줄 아는 호사가들의 음식이지 평민들이 쉽게 맛볼 수 있는 그런 음식은 아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여행을 한답시고 갯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봄철 주꾸미를 먹어 본 것이 불과 10여 년 전 일이다.

은퇴 후 천 개의 산을 오를 목표로 결성한 천산(千山)대학 친구들과 함께 서해의 위도로 가기 위해 격포항에 이르렀을 때다. 식당 창문 틈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멀고 낯선 곳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기특했다. 우쭐우쭐 문을 열고 들어가니 ROTC 동기생이 친구들과 낙지 샤브샤브를 해놓고 한창 먹고 있는 중이었다.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낙지 몇 마리를 먹어보니 그 맛은 귀신들의 생일파티 때나 먹는 아주 특별하고 별난 음식이었다. 위도 산행을 마치고 해넘이 민박에서 1박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식당에 들렀더니 재료가 달려 낙지 샤브샤브는 먹을 수가 없었다. 대신에 주꾸미 먹통을 터뜨려 끓여준 검은 라면 맛은 좀처럼 잊지 못할 별미 중의 별미였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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