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숨결… 도시 전체가 '야외박물관'
경주 시내버스 노선의 결절점은 경주역이다. 거의 모든 노선이 경주역을 거쳐 지나간다. 포항시 장기면에서 800번을 타면 경주시 감포읍 감포항까지 20분이 걸린다. 오후 5시 30분 감포에서 100번으로 갈아탄 뒤 40분을 달려 경주역에 도착했다.
경주는 당황스러웠다. 천년 고도에 남겨진 엄청난 유적과 유물, 문화재까지. 어디서부터 시작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고민 끝에 불교문화의 집적지인 경주 남산과 도심을 둘러보기로 했다.
◆삼릉 가는 길
월정교에서 삼릉 주차장까지 서남산 기슭을 걷는 길이다. 월정교에서 천관사지와 오릉, 김호장군고택, 나정, 창림사지, 포석정, 지마왕릉,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등을 거친다. 김환대 신라문화원 문화재보존활용센터 팀장의 안내로 나정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거리는 5㎞가량이다. 이 길에는 초기 신라의 유적들이 많다. 경주역에서 나정까지 가는 버스는 500번, 505번, 506번, 507번, 508번 등이다. 특히 500번은 2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500번 버스에서 내려 200여m를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서라벌이 세워지기 전에 6개 씨족 마을의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나정은 신라 최초의 왕인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얽힌 곳이다. 남간마을은 전체가 절터다. 집집마다 절터에서 가져온 덮개돌이나 석재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우물과 돌로 만든 하수구 등의 흔적도 있다.
농로를 따라가면 보물 제909호인 남간사지 당간지주를 만난다. 높이 3.6m로 남산 일대에서는 유일한 당간지주다. 당간지주는 절 입구에 깃발을 꽂거나 불화를 그린 깃발을 걸었던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좌우에 세우던 기둥이다. 특히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기둥 윗부분에 십자 모양의 홈이 파여진 점이 특징이다. 1㎞가량을 농로를 따라 걸으면 창림사지가 나타난다. 창림사지는 신라 초기 궁궐터다. 산 중턱 위로 우뚝 솟은 창림사지 삼층석탑을 보고 방향을 틀었다. 탑 기단부에는 팔부중상이 조각돼 있고 여닫이문과 동그란 문고리 모양도 조각돼 있다. 탑에서 오솔길로 조금 내려오면 거북모양의 비석받침대가 남아 있는데 거북 두 마리가 붙어 있는 보기 드문 형태다. 발톱이 둥글고 등껍질은 부드러운 곡선이다.
포석정에는 야외학습을 온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사실 포석정에서 볼만한 건 별로 없다. 유명한 전복 모양의 돌 홈과 섬돌이 전부다. 포석정은 통일신라 말기 경주까지 침입한 후백제의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자결한 곳이라 전해진다. 신라의 시작과 끝이 삼릉 가는 길 위에 있는 셈이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소나무, 대나무 숲을 따라 내려가면 키 큰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지마왕릉을 만난다. 장끼 한 마리가 쪼르르 뛰어 풀숲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왕릉 옆의 오솔길을 따라가면 남개연이 가득한 태진지가 있고 삼불사 주차장을 지나 보물 제63호인 배동석도여래삼존입상이 있다. 신라 시대에 가장 오래된 불상이라는데 햇살이 비치니 불상이 마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삼존불 옆의 등산로로 5분 정도 올라가면 숨겨진 불상이 또 있다. 대나무 숲을 지나 두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쓰러져 있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옷 주름이 형태를 짐작케하지만 머리가 없고 손도 사라져 어떤 불상인지 알 길이 없다. 망월사 방향으로 길을 따라가면 아름드리 소나무가 빼곡한 숲 속에 왕릉 3기가 모여 있는 삼릉이다. 사실 삼릉보다 굽은 소나무의 삼릉 숲이 더 유명하다.
◆경주 남산의 보물찾기
경주 남산은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이다. 남산에서 발견된 절터만 112곳이나 되고 690여 개에 이르는 유적과 유물이 가득하다.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에는 불교문화의 흔적이 빠짐없이 남겨져 있다.
삼릉~선각여래좌상~상선암~상사바위~금오봉~용장사 삼층석탑~용장마을 코스로 잡았다. 거리는 8㎞. 남산은 해발 500m에도 못 미치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산은 아니다. 길이 가파르고 바위가 많아 다리도 아프고 빨리 걷기도 어렵다.
삼릉에서 산으로 올라가면 머리가 없는 석불좌상과 마애관음보살입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다. 머리가 없는 석불좌상은 높이 1.6m, 무릎 너비 1.56m로,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 이곳에 안치했다. 북쪽에는 마애관음보살의 입상이 있다.
등산로만 따라서는 유물들을 만나기 쉽지 않다. 상선암을 800m가량 앞둔 이정표에서 계곡길 방향으로 들어섰다. 30m가량 걸어 돌계단을 오르니 선각육존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거대한 화강암 바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부처를 새겨넣었다. 원래 채색이 돼 있던 것으로 바위 위에는 건물 지붕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선각육존불 뒷길을 따라 올라갔다. 15분 정도 걸어가니 선각여래좌상이 나타난다. 얼굴 부분만 돋을새김을 하고 나머지는 선으로 표현한 점이 특징.
삼릉계곡 중턱에는 보물 제666호 삼릉계 석불좌상이 있다. 얼굴 부분 아래쪽 뺨과 코, 입 등은 복원된 흔적이 남았다.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석굴암보다 시기적으로 후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상선암을 지나 더 올라가면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보인다. 낙석 탓인지 탐방로를 막고 보존 작업에 한창이었다. 높이가 7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데 머리는 입체적으로 깎았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돼 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이 둥글어 친근한 인상이다. 금오봉으로 가는 등산로 아래쪽에는 상사바위가 있다. 바위벽 중간에 있는 틈에 돈을 던져 넣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금오봉(468m)을 지나 400여m를 걸으면 용장사터가 나타난다. 용장사터 높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있다. 용장사터에서 내려가는 길이 만만치않다. 큰 바위에는 매어둔 로프를 잡고 내려가야 했다. 험한 돌 길을 30분 이상 더듬거리고 내려오니 용장골이다. 탐방객들이 맑은 계곡물에서 땀을 식히며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경주 도심의 유적들
500번을 타고 경주역으로 되돌아왔다. 아픈 다리를 달래며 숨을 돌리고 경주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도심의 유적'유물은 대릉원을 중심으로 둘러보면 된다. 경주역에서 대릉원까지는 1㎞ 거리다. 20여 기의 고분들이 봉긋봉긋 솟아있는 대릉원에는 천마총을 비롯, 미추왕릉'황남대총 등을 두루 둘러볼 수 있다. 대릉원을 지나면 첨성대가 코앞이다. 첨성대 부근에는 계림과 반월성, 경주향교, 안압지 등의 유적지들이 한데 모여 있어 구석구석 누비는 재미가 있다. 국립경주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날이 저물자 안압지 주변은 야경을 보려는 인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방문객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야경을 담기 바빴다. 천 년 전, 어느 밤에도 서라벌은 이렇게 활기에 넘쳤을까.
김태중(82) 전 경주문화원 원장을 만났다. 1996년부터 2002년까지는 경주문화원 원장을 지냈던 그는 경주가 문화 불모지였던 1956년부터 신라문화동인회를 결성해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일제강점기에는 박물관으로 사용했던 경주 관아 앞에 골동품 상회가 있었어요. 문화재를 사고파는 일도 흔했죠. 일본인들은 문화재를 골동품 취급했으니까요." 그는 문화재를 꾸준히 모아 근무했던 학교에 100여 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특히 흑륭사 절터에서 발견한 '영묘사'라는 기와를 주워 원래 절 이름을 밝혀내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한동안 사정은 비슷했다. 문화재는 정비가 되지 않았고, 논밭이나 숲에 파묻혀 있었다. 새마을운동 당시 초가집을 없애면서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훼손되기도 했다. 무열왕릉과 고분 사이에 도로가 나거나 사천왕사 절터 중간을 철도가 가로지르기도 했다. "문화재 보호와 관광자원이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관광산업 위주로 하니 어긋난 거죠. 경주 남산은 불교문화 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신앙의 중심지예요. 민속 신앙과 도교의 도량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다양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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