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1912~1996)
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백석 전집』(김재용 엮음, 실천문학사, 1997)
백석, 참으로 많은 후배 시인들이 오마주와 모방과 헌사를 바친 시인이다. 백석은 말이 없는데 뒤따르는 시인들이 맘대로 백석산을 만들고, 또 그 산을 넘겠다고 한다. 제 산을 쌓을 생각은 안 하고 '환상의 산'을 만든 결과다. 시는 존재의 표현이지 경쟁물은 아니잖은가. 차라리 백석을 버리라고 주문하고 싶다. 존경하는 것만으로도 최선의 예를 다하는 것이다.
백석은 오산학교 선배인 열 살 맏이 김소월을 존경했다. 하지만 백석은 소월산을 만들지도 넘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백석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만의 시를 썼다. 소월과 백석은 각기 다른 산을 쌓았다. 그렇게 해서 그 고난의 시절에 아름다운 한국시의 진경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시를 바닥 예술이라고 본다. 백석과 김소월은 한국사에서 가장 바닥을 치던 시대를 살았고 스스로도 바닥의 삶을 경험한 시인들이다. 우리 시대에 시의 거장들을 보기 어려운 이유도 우선은 거기에 있다고 본다. 진경은 함부로 만들어지지도 만들 수도 없는 것이다.
내가 애송하는 이 시는 백석의 연애사에 남아 있는 한 갈피다. 연인을 친구에게 빼앗긴 사연이 있는 통영이어서 더 애틋하다. 그것도 예감이나 한 듯 실연에 앞서 일찌감치 쓴 시다. "조개도 울을 저녁"이라니. 시안(詩眼)이다. 그 눈빛은 웃음과 눈물과 애틋함과 설렘으로 아찔하다.
시인'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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