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람 신드롬' 이면은…
나쁜 남자, 나쁜 여자들이 돌아왔다.
'착한 남자 신드롬' 등에 밀려 잠시 모습을 감췄던 이들이 다시 복귀했다. 드라마나 영화, 가요계를 잇따라 접수하고 있다. 이들은 예전부터 '옴 파탈' '팜 파탈'이란 이름으로 여러 대중문화 콘텐츠에 단골소재로 등장해 왔다. 그러나 최근 더 악랄해졌다. 착했던 남자'여자들까지 물들이며 나쁜 바이러스를 전파 중이다.
급기야 현실의 세계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실생활에서도 나쁜 사람들이 맹활약(?) 중이다. 청와대 대변인은 물론, 검찰 고위 관계자들도 나쁜 남자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쁜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닌 게 되어 버렸다. 강렬한 개성으로 때로는 카리스마로 여겨지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나쁜 것에 은근히 끌리는 대중의 심리와 맞물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악역 전성시대
얼마 전만 해도 배우들은 악역을 맡길 꺼렸다. 드라마나 영화의 특성상 한 번 악역을 맡으면 그 이미지가 꽤 오래가고 연기를 잘하면 잘할수록 욕도 많이 먹는 것이 악역이었기 때문이다. 실생활에서도 손가락질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근래 들어 시청자들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멋진 악역을 맡아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싶다'는 배우들도 늘고 있다. 당연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악역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때로는 눈에 보이는 뻔한 거짓말로, 끔찍한 악행으로 안방극장을 종횡무진하고 있다.
'일밤-아빠! 어디가?'를 통해 착한 아버지의 이미지로 알려진 성동일.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악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음모와 권모술수의 달인, 소름 돋는 냉정한 모습의 악마로 변신했다. 천사 같은 이미지로 사랑받았던 김태희. 오히려 착해서 욕까지 얻어먹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장옥정으로서 본격적인 악랄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MBC 주말드라마 '백년의 유산'에서 방영자 역할을 맡은 박원숙은 사채로 악착같이 돈을 모은 방영자를 연기하며 그야말로 '막장 시월드'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며느리 민채원(유진 분)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가 하면 아들과 이혼시키기 위해 며느리에게 누명을 씌우는 악행을 저질렀다.
MBC 일일드라마 '오자룡이 간다'의 맏사위 진용석(진태현 분) 역시 나쁜 짓에는 안면몰수. AT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다. 아내 몰래 불륜을 저지르는가 하면 혼외정사로 낳은 자식을 입양했다. 횡령은 기본. 심지어 장인어른을 죽음에 이르게도 한다. MBC 월화드라마 '구가의 서'에서는 착했던 역만을 해왔던 이성재가 악인으로 등장한다. 전작인 MBC 주말드라마 '아들녀석들'에서 보여준 착하고 순수한 역과는 180도 다르다. 성실하고 착한 남자의 대명사인 이창훈. 그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감싸주며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뤄가는 역할을 자주 맡았다. 그러나 '남자가 사랑할 때'라는 드라마에서는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돈 앞에 친구를 배신하는 냉혈한으로 나온다.
◆가요계도 나쁜 사람
가요계에도 '나쁜'(?) 사람들이 있다. 최근 가수 이효리가 3년 만에 발표한 '배드 걸스'가 발표와 함께 국내 모든 음악 사이트 실시간 차트 1위를 기록했다. 투애니원(2NE1)의 씨엘이 발표한 첫 솔로곡 '나쁜 기집애' 역시 싸이월드뮤직을 제외한 국내 전 음악 차트 1위를 휩쓸었다. 이효리와 씨엘이 '나쁜 여자'로 대중에게 다시 돌아온 셈이다. 올해 초에는 걸그룹 레이디스 코드가 '나쁜 여자'란 노래를 앞세워 가요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해 11월 주니엘은 '나쁜 남자'를 발표해 가요계를 평정했다. 가수 비가 '나쁜 남자'로, 미쓰에이가 '배드 걸, 굿 걸'로 데뷔해 스타덤에 오른 후 몇 년 만에 제대로 된 나쁜 가수들이 등장한 것.
나쁜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들도 동시다발적으로 나오고 있다. 지난해 개봉된 '범죄와의 전쟁' '도둑들'이 악랄함이 뭔지 관객들에게 제대로 보여줬다. 올 들어서는 경찰이 경찰을 배신하고 가장 악랄한 조폭이 되는 이야기를 다룬 '신세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박기웅 문화 평론가는 "예전부터 '나쁜 사람'들은 주요 문화 콘텐츠였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악역은 갈등을 유발해 주요 사건이 벌어지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연에 그쳤던 이들이 드라마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시청자들이 착한 주인공보다 나쁜 주인공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나쁜 노래들 역시 '나쁜 것'에 은근히 끌리는 대중의 심리와 맞물려 있다"고 분석했다.
◆'나쁜 사람 신드롬' 왜 인기일까
'나쁜 사라암∼, 나쁜 사라암∼.'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나쁜 사람' 속 개그맨 이문재의 '유행어'. 이문재는 경찰서에 잡혀온 범죄 용의자를 심문하다 슬픈 사연에 눈물을 흘리며 '나쁜 사람'이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이 유행어는 올 초부터 초등학생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있다.
'나쁜' 바이러스가 안방극장과 영화, 가요계를 넘어 현실세계로 전파되고 있는 셈. 실제 현실세계의 악역들도 드라마나 영화 못지않게 활약 중이다.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경우 방미 기간 중 인턴을 성희롱한 탓에 국민적인 나쁜 남자로 이름을 올렸다.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도 성 접대 의혹으로 나쁜 사람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드라마나 영화 등은 현실을 반영한다. 윤창중 대변인의 성추행 추문 등 연일 터지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비리,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건 등 현실세계의 '나쁜 바이러스'가 가상세계로까지 전이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지도층의 나쁜 짓은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파괴력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악역에 열광하는 것은 '영화는 영화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는 생각에서다.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통해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을 준다. 영화평론가인 조희문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는 "수많은 직장인들은 생존에 대한 불안과 비애를 느낀다. 영화나 드라마 속 나쁜 남자, 나쁜 여자는 현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며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될 경우 '나쁘다는 인식에 대한 관념을 바꿀 수 있어 결국 범죄행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도건우 2040미래 연구소 소장은 "매력적인 악역이 주인공이 되면 대중문화를 오랫동안 소비해온 대중의 머릿속에는 '나쁜 남자' '나쁜 여자'가 좋은 의미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는 개성이 강한 사람에 대한 욕망과 함께 현실세계에서 나쁜 짓이 '개성이 강하고 매력적이다'는 의미로 오도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사회 지도층의 잘못이 반복적으로 이뤄질 때, 성공한 사람은 해도 된다는 식의 사회적 인식이 자라날 수 있어 사회적 범죄심리를 키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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