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공원 정문에서 시내 쪽으로 200여m쯤 가다가, 씨익 웃는 돼지 얼굴이 걸린 돼지국밥 집을 끼고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돼지 창자처럼 꼬부라진 골목길이 나옵니다. 수십 년 동안 재개발의 포클레인은커녕 호미 날 한 번 지나가지 않은 데다가 대낮에도 햇빛 한 자락 들지 않아 늘 그늘이 푸석푸석 쌓여 있는 길이지요. 그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서 방뇨 자국이 지린내를 폭폭 풍기는 담벼락을 몇 블록 지나가면, 제 키보다 더 큰 간판을 힘겹게 붙들고 서 있는 '달구벌노인사랑의집'이 나옵니다.
버려진 가구들처럼 자식들한테서 버림받았거나, 대낮에 약장수 나팔 소리 따라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 오갈 데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머무는 이집에, 오늘은 아침부터 원장 선생님의 괄괄한 목소리가 굼뜬 노인네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토끼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정의 달 오월을 맞아 경로효친실천자율봉사단이 방문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따, 원장님이 저래 요란시럽게 닦달하는 거 보니께 오늘은 목탁 큰 부처님이 오실랑가, 수염 긴 예수님이 오실랑가. 어쨌든동 흉년의 보리자루처럼 늘 허전한 배속 제대로 한 번 채우겠네."
"누가 오든동 그게 무슨 상관이고. 경로효친…, 뭐라든가 그 긴 이름처럼 선물이나 기차처럼 긴 차에 가뜩 실고 왔으면 좋겠구만."
"거, 뭐라 캐쌌는교,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고. 그라고 뽀글이 할매요. 제발 벽에 걸어놓은 저 빤스 좀 걷어 치우시요잉. 그라고 저 임꺽정 할배는 수염 좀 깎으시고. 산도둑놈처럼 인상이 험악하면 찾아오는 손님들 기분이 좋겠소. 저 뭣이냐, 영천 할매는 맨날 그 재색 쉐터만 입으면 사진이 잘 나오겠소? 다른 옷이 없으문 옆의 할매하고 바꿔 라도 좀 입으소. 각자 앉은 자리 걸레질 깨끗이 하고, 각자 달고 다니는 얼굴도 좀 깨끗이 씻어 얹고…."
기다림은 늘 늙은이들 몫이지요. 식탁 앞에 박물관 밀랍 인형처럼 줄지어 앉은 노인네들 배속의 꼬로록대는 합창 소리가 삼절로 넘어갈 무렵에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주머니들이 나눠 줄 선물과 맛있는 음식 보따리를 들고 달구벌노인사랑의집 대문을 들어왔습니다. 봉사단 아주머니들은 저마다 얼굴에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미소를 그리며, 미리 장만해온 음식들을 식탁 위에 펼쳐 놓았습니다. 순식간에 열 가지도 넘는 반찬에다 고슬고슬 뜸이 잘 든 쌀밥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고기국과 색색 가지 떡이 푸짐하게 차려졌습니다. 그리고 원장님의 환영사에 이어 봉사단 단장의 인사말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동안 사방에서 카메라 불꽃이 봄날의 벚꽃처럼 터졌습니다.
식사가 막 시작될 무렵, 정주자 할머니는 들었던 숟가락을 놓고 살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소고기 국을 나르던, 안경 낀 색시가 아무래도 몇 년 동안 못 본 조카며느리 같아서 눈이라도 마주쳐 알아채게 되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그보다도 오전에 김씨 영감이, 건네준 신문 광고 조각을 생각하면 진수성찬은 고사하고 물 한 모금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큰길 가로수에 기대앉아 숨을 몰아쉬는 할머니 옆에서, 뒤따라온 강아지도 혀를 내밀고 할딱거립니다. 할머니를 따라 집을 나섰다가 함께 길은 잃은 이후로 할머니 곁을 한발자국도 떠나려 하지 않는 녀석입니다. 할머니는 땀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신문조각을 다시 읽어봅니다.
낑낑대는 강아지를 달래는 정주자 할머니의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똘똘아, 니를 찾는 게 틀림없다. 이름이 똘똘이라 카잖아. 전화번호도 애비 전화번호가 맞는 것 같고. 그란데… 우짜만 좋노? 니만 애타게 찾지 이 할미를 찾는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구나. 애비, 어미, 손자 효동이까지, 모두 이제 이 늙은이를 영영 잊어뿔랑갑다. 그래도 우짜겠노? 내일 김 영감 한테 부탁해 볼 테니 제발 니는 집에 들어가거라. 니가 없어져서 우리 손자 효동이가 굶고 있다 안 카나. 가가 아프면 내가 아픈 기다. 나는 괜찮다, 괜찮다…."
아까부터 할머니를 내려다보던 해님이 가로수 잎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김동국/시인 poetkim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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