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편지] 인어공주

입력 2013-05-27 07:25:09

가끔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의사 생활을 20년 넘게 하면서 기억에 남은 환자가 어디 한둘뿐일까? 하지만 청소년들에게 의사에 대한 꿈을 심어주고플 땐 이 환자 이야기를 해준다.

수면 부족과 고된 일과로 하루 24시간도 모자라던,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던 레지던트 시절이었다. 평소처럼 아침 보고를 마치고 응급실에 들렀을 때 한 여학생이 응급실로 실려왔다. 당직 의사는 아니었지만 가장 가까이 있었기에 환자를 살피게 됐다. 호흡은 멎었고 얼굴에는 청색증이 나타났다. 학교 선생님인 듯한 보호자 말로는 "원래 천식이 있던 아이인데 아침에 갑자기 천식 발작이 생겼고 평소 갖고 다니던 천식 치료용 흡입기를 사용해도 좋아지지 않아서 병원으로 오던 중 구급차 안에서 호흡이 멎었다"고 했다.

응급실은 넘쳐나는 환자로 침대는 꽉 찼고, 심지어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야 하는 형편이었다. 곧바로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무릎을 꿇고는 기관 삽관(기관지에 튜브를 넣어 외부에서 공기를 주입하는 시술)을 시도했다. 바닥에 누운 환자에게 불편한 자세로 시도하는 것은 힘들었다. 워낙 응급 시술을 많이 하던 때여서 기관 삽관만큼은 '달인'이 돼 있던 덕분에 다행히 성공했고, 곧이어 인공호흡'산소 주입'심장 마사지 등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심장 박동은 곧 돌아왔지만 천식 발작이 워낙 심했던 탓인지 계속된 인공호흡에도 스스로 숨을 쉬지 못했고, 의식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윽고 응급실 당직 의사가 도착해 환자를 맡기고는 엄청나게 많은 나의 일을 해결하러 떠났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며칠 뒤 문득 그 여학생이 궁금해져서 담당의사에게 물어보았다. "아, 그 여학생? 의식도 돌아오고 많이 좋아져서 인공호흡기 떼고 곧 퇴원할 거야." 나이도 어리고 천식 외에 다른 병이 없어서 쉽게 회복됐구나 생각하고는 다시 그 학생을 잊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 이야기를 들었다. 그 학생은 의식이 깨어난 뒤 응급실 담당의사가 자기를 살렸다고 생각하며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단다. 정작 살려준 것은 바로 나인데….

동화 '인어공주'가 떠올랐다. 배가 난파돼 물에 빠져 죽게 된 왕자를 살려준 것은 인어공주였는데, 왕자는 해변에서 깨어난 뒤 엉뚱한 사람을 생명의 은인으로 알았다는 이야기. 하지만 인어공주는 섭섭해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왕자가 살아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으므로.

비록 그 학생도 자기를 살린 의사가 나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겠지만 이미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구했으니 더 이상 뭘 바랄까? 나만이 느끼는 그 보람이 오늘도 의사로서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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