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通] 소외계층 돕기 사회운동 한평생…한재흥 목사

입력 2013-05-25 07:05:42

30년전 청년시절 단돈 만원 들고 대구 와 빈민운동…이젠 가난의 땅 라오

도시 빈민
도시 빈민'북한이주민'다문화가정돕기에 평생을 바쳐온 한재흥 아시안 브릿지 대구경북 대표는 라오스의 어려운 주민들에게도 꿈을 갖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한재흥 목사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북한에서 연탄 나눔운동을 펼치고 있다.
한재흥 목사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북한에서 연탄 나눔운동을 펼치고 있다.
아시안브릿지는 라오스 방비엥 등지에서 활발한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아시안브릿지는 라오스 방비엥 등지에서 활발한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한재흥 아시안 브릿지 대표는= 한 대표는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면목초
한재흥 아시안 브릿지 대표는= 한 대표는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면목초'경희중'보성고를 거쳐 영남신학대'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목사로서 목회 활동과 사회운동에 헌신해왔다. 연고가 전혀 없던 대구에 1985년 처음 온 뒤 빈민층과 북한이탈주민'다문화가정 등 소외계층을 위한 봉사를 주도해왔다. 그가 이끄는 아시안 브릿지 대구경북 사무소는 라오스 아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줄 자원봉사단을 모집하고 있다. 문의 053)573-0823, 070-4645-0824, 카톡 ID pbd0523. 이상헌기자

그의 시선은 늘 낮은 곳을 향했다. 노동자'빈민'새터민'다문화 같은 단어가 그의 평생 친구들이다. 분단과 압축성장시대를 지나온 우리사회가 꼭꼭 숨기고 싶은 상처들이다.

그 역시 애초부터 그런 삶을 꿈꾸지는 않았다. 의도하거나 계획한 적도 없다. 하지만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냥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 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사명감이었다. 지천명(知天命)을 훌쩍 넘긴 나이에 더 어려운 이웃을 찾아 인도차이나 반도로 떠난 까닭이기도 하다. "젊은날에 더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만 있다"는 한재흥(54'목사) '아시안 브릿지' 대구경북 대표를 23일 라오스 출국에 앞서 만났다.

◆"난 원래 지독한 빈민"

한 대표는 사실 대구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회운동가다. 1980년대 중반부터 공단지역 노동자와 빈민들을 대상으로 민중교회'노동운동을 펼쳤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사)자원봉사능력개발원 대구쪽방상담소를 이끌었다.

서울 출신인 그에게 대구가 '제2의 고향'이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는 대구를 처음 찾은 날을 1985년 8월 31일이라고 정확히 기억해냈다.

"20대에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어느날 민중교회 설립을 위해 지방에 내려갈 자원자를 신청받는데 대구는 아무도 지원하지않더군요. 군사정권의 근거지로서 보수적 색채가 강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속버스에서 내린 뒤 대구의 첫 인상은 높은 빌딩이 별로 없어 신기했다는 것이었어요."

쪽방과 여인숙 옥탑방을 전전하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생활이었지만 불편하다는 생각은 들지않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원래 지독한 빈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선친이 빈민촌이었던 서울 삼양동 돌산마을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제대로 먹을 것도 없던 시절이었죠. 하루는 학교에서 저금해야 한다며 100원을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물론 저는 가져가지 못했고, 담임 선생님은 '돈 없는 놈은 학교에 나오지 마라!'며 따귀를 때리셨죠. 어떤 이에게는 가난이 계층 상승의 모티브가 되었겠지만 저에게는 '어떻게 하면 어려운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수 있을까'라는 화두가 됐습니다." 그 시절의 '아픔' 때문에 지금도 수제비는 먹고 싶지않은 음식이라는 게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대구 침산동'원대동 등지에서 청년운동에 몰두했던 그는 한때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대구실내체육관 근처에 있던 안경 공장이었다. 노동 현장을 직접 겪어봐야 노동자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이후 담임을 맡았던 교회에 노동자 문화교실, 노동상담소, 주민도서실, 무료진료소 등을 열었다.

"당시 저희 교회에 나오는 노동자 가운데에는 정말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예배당 안에 칸막이를 치고 함께 살았죠. 지금 돌이켜보면 종교인으로 목회에 전력할 것이냐, 사회운동에 매진할 것이냐를 두고 참 많이 갈등했던 것 같습니다."

◆더 돕지 못해 미안할 뿐

한 대표는 1997년 (사)자원봉사능력개발원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라 거리마다 노숙자가 넘치던 때였다. 정부는 급하게 노숙자 대책을 세웠지만 여의치않자 쪽방상담소를 설립했다. 대구에는 2001년 2월 설치됐고 그가 2008년까지 소장을 맡았다.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전화를 받아보면 '족발상담소'가 뭐 하는 곳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쪽방이란 단어가 생소했을 테지요. 하루는 사무실 근처 쪽방에 불이 나서 달려갔는데 구경만 할 뿐 아무도 불을 끄지않더군요. 나중에 그 쪽방 아저씨가 생필품을 받으러 사무실에 왔길래 왜 불을 끄려하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내한테 뭐가 있는교'라며 오히려 반문하더군요. 허허허."

지나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이야기 보따리는 끝이 없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릴 때면 잠시 호흡을 가다듬기도 했다. 어짜피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도움이 간절한 사람들을 위해 더 돕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북받치는 듯 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무료급식 후원 기관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직원이 급식받는 분들의 자존심이 상하지않도록 몰래 사진을 찍다가 그만 들켜버렸어요. 제 멱살을 잡던 아저씨들의 그 성난 표정! 아직 생생합니다. 또 노숙과 쪽방을 넘다들다가 결혼까지 하고 가게를 차려 제법 자리를 잡았다는 김씨 아저씨, 예전에 꾸어간 돈 3만원을 갚지 못해 죄송하다며 아직도 연락주시는 박씨 아저씨, 어버이날 홀로 쓸쓸히 돌아가신 칠성동 쪽방 이씨 할머니..... 모두 보고 싶네요."

쪽방상담소를 운영하면서 그의 활동 반경은 점점 확대됐다. 2003년에는 북한이주민 정착지원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대구에만 북한이주민이 700명을 헤아렸지만 지원기구는 전무했던 터라 그가 나선 것이었다. 사업은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이듬해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북한이주민의 정착 초기단계부터 지원하는 서비스를 시작했고, 2009년에는 통일부의 '북한이탈주민 지역적응센터' 시범지역 실시기관으로 선정됐다. 지금의 '대구 하나센터'다.

"제가 평안북도 실향민의 아들이라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부의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에서 사회적응교육을 받고 대구에 온 북한이주민들이 제게 바짝 군기가 든 모습으로 인사할 때면 너무 안타까웠죠. 하지만 말 못할 고민도 많았습니다. 진보 진영에선 왜 그런 사업에 나서느냐고 비판했고, 보수 진영에서는 사업에 의혹이 많다고 공격했죠."

◆국제NGO

각급 단체'기관과 기업체가 쪽방생활자'홀몸노인'장애인들에게 연탄을 보내주는 풍경은 겨울철의 대표적인 이웃돕기 행사로 자리잡았다. 대구에서 연탄 후원이 활성화된 데에는 2005년부터 '사랑의 연탄 나눔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온 한 대표의 공이 크다. 그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북한에도 여러 차례 연탄을 전달하러 다녀왔다.

그가 세계로 눈을 돌린 것 역시 연탄이 계기였다. 연탄 나눔운동에 적극 참여해온 아진산업 서중호 대표의 후원으로 2010년 떠난 캄보디아 자원봉사였다. "사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자긍심을 키워주자는 취지에서 기획했었죠. 대구 시내 각 시설에서 추천받은 30여명의 아이들과 캄보디아 빈민촌에서 봉사했는데 그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내가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제 NGO활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동기였죠."

그가 대구경북 대표를 맡고 있는 아시안 브릿지(Asian Bridge)는 2003년 여성연합'YMCA 등 국내 시민단체 6곳이 공동으로 설립했다. 필리핀에 설치한 '아시아 NGO센터'가 시초다. 아시아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세계 각국의 관심과 참여를 촉구하고,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대안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목표다. 아시안 브릿지는 2008년 한국사무소를 연 데 이어 2010년에는 인도 사무소와 대구경북 사무소를 열었다.

"글로벌 시민 아카데미, 활동가 대상 해외 연수, 결혼이주민 여성의 사회참여 지원 등이 주요 프로그램입니다. 필리핀 몬탈반 쓰레기마을과 까부야오'바세코에서는 빈민촌 봉사, 인도 바라나시지역의 아쉬람 대안학교와 베트남 벤쩨 초등학교, 라오스 방비엥 초등학교에선 교육'문화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자연을 소중히 여기며 여행을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취지의 '착한 여행'사업도 펴고 있고요."

2011년부터 1년의 반은 라오스에서 보내고 있는 그는 앞으로 5년 정도는 현지에 완전히 정착해 활동할 생각이다. 라오스 정부에 국제NGO 자격도 신청해뒀다. 열강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라는 동질감과 가는 곳마다 깨끗한 마실 물조차 없는 현지의 비참한 현실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처음에 현지 정부를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하니 말만 하고 안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합디다. 그래서 올 봄까지 모두 5번, 50명씩 자원봉사단을 이끌고 찾아갔죠. 이제는 협조가 잘 돼서 국제NGO 등록에 필요한 금액도 절반 이하로 깎아줬어요. 그런데 솔직히 외롭고 두렵습니다. 26살 때 단돈 만원 들고 대구에 처음 올 때는 안 그랬는데. 그 때보다 후원자도 늘고 경험도 풍부해졌는데 말이죠.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하루 종일 먼지 마시고 밤이면 10불짜리 게스트 하우스에 누워있으면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요. 한국에서 봉사단이 많이 와주시면 좋을텐데...."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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