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카네이션 두 장

입력 2013-05-24 10:58:21

인지되는 것만이 존재한다. 철학자 조지 J. 버클리가 말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인지능력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이 더 많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실생활에 수두룩하다. 행복이 바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소유가 곧 행복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이 깨어지는 시대다. 머리로 아무리 계산해도 보이지 않던 답이 한 번의 뜨거운 가슴으로 발견되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페르시아의 한 시인은 말했다. '은전 두 닢이 생긴다면 그중 한 닢으로 빵을 사고, 나머지 한 닢으로 영혼을 위해 히아신스를 사리라.'

빵을 구입하는 데 은전 두 닢을 다 쓰지 않고 한 닢 남겨 꽃을 사는 이 가난한 시인의 행동을 오늘날 현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모든 것을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보는 이에게는 바보스러움의 극치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참으로 멋없이 편리해진 시대, 우리는 문명의 높은 곳에 올라 많은 것을 움켜쥐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행복의 파랑새가 틀 만한 둥지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돈은 필요하지만 필수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끔씩은 물질에서 해방되는 순간, 순백의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지난 어버이날이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고3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화구통에서 도화지 두 장을 꺼내 건네면서 말한다.

"아빠, 카네이션 살 돈도 없고 해서 그냥 그렸어요. 미안해요."

펼쳐보니 아들 녀석이 직접 그린 카네이션이었다.

작은 개척교회의 가난한 목사, 무명 작가인 아버지로부터 용돈은 아예 기대하지 않고 지내던 아들의 어버이날 효도법이다. 도리어 미안해하는 아이보다 뭉클 솟아나는 아비의 미안함이 더 커서일까. 무심한 척 고개를 돌려 아이를 외면하고 말았다. 차비와 저녁밥 값 외에 한 푼도 더 주지 못했던 이날, 남들이 쉽게 사는 카네이션 두 송이를 구입할 돈이 없었던 아이를 생각하니, 붉어진 눈으로 차마 아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아비 얼굴에 밴 여리고 무른 표정을 보았는지 아들은 뒤돌아서서 난생 안 하던 몸짓을 한다. 손으로 만든 하트 모양을 제 가슴에 댄다. 내가 헛것을 봤나.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작고 시답잖아 보여도 신(神)은 각자가 캐낼 만한 행복의 보화를 우리 속에 감추어 두었나 보다. 내 안에 있는 보화를 캐낼 생각은 않고 바깥에 있는 보화만 기웃기웃거린다면 행복의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이 행복이라면 그것을 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자기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함이 옳다.

성서에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절제'가 사라진 허기진 터에 '과함'만 들어섰다. 물질적 풍요와 함께 슬그머니 따라 들어온 마음의 기근을 어찌하랴. 따라서 우리가 불행하다고 일컫는 것이 꼭 불행한 것만이 아닐 수 있다.

비록 기름진 식탁, 시시해진 풍요를 으스대며 살지 못하더라도 따뜻한 밥 한 끼에 숭늉 한 사발 할 수 있음에, 광야 같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동행할 수 있음에 감사할 줄 안다면, 어찌 인생의 진정한 기쁨이 금전적 소유에만 있다 하겠는가.

붉고 싱싱한 꽃은 비록 아닐지라도, 살아있는 제 숨결 녹여 넣었으니 도화지에 그린 종이 꽃이면 어떠랴. 물려받은 재주 달랑 하나 지니고 맨몸으로 치열하게 사는 한 아이의 가난한 사랑이 마음의 풍요를 일구어 가고 있으니 여한이 없다.

밤 깊은 시간, 아내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말없이 앉아 있다. 훌쩍이다가 이젠 히죽히죽 웃고 있다. 이 밤에 울다 웃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해도 요동이 없다.

아들의 '카네이션 두 장'이 방바닥에 고이 깔려 있다.

이상렬/수필가·목사 love20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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