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학의 시와 함께] 벼랑의 일각수-김충규(1965~2012)

입력 2013-05-23 07:29:02

'벼랑의 일각수' 김충규(1965~2012)

벼랑에서 일각수가 기이한 울음을 흘립니다

목숨 있는 것들의 최후가 왜 죽음이어야 하는지

죽지 않고 사라질 수는 없을까요

팽팽하게 잡아당긴 화살을 거두세요

일각수의 뿔이 다른 세상을 향하여

신호를 뿜어내고 있는 듯 환하게 빛납니다

죽음 직전이 처연히 찬란하다면

그건 일각수의 불행이 아니라 사냥꾼의 불행입니다

일각수의 시체를 메고 내려가다 실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앞에 문득 다시 나타난 일각수입니다

숲을 쑤시고 다니다가 스스로 벼랑으로 간 일각수입니다

선택은 일각수가 하게 내버려 두세요

죽여 놓고 노루나 사슴이었다고 둘러댈 건가요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일각수가 스스로 벼랑 아래 몸을 던진다면

그건 일각수의 운명입니다

다만 목숨 있는 것들의 최후가 죽음이 아닐 수만 있다면

좋겠네요 일각수는 우리의 금지된 일탈이니까요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1년 9, 10월호)

사람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삶의 전부를 소모한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어쩌면 덜 행복하거나 불행하다. 그러나 진정 불행한 것은 다른 데 있다. 바로 죽음이다. 덜 행복하거나 불행한 삶조차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어떤 지점, 바로 죽음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행복 추구와 죽음에 대한 인식을 늘 유념하며 살아간다. 생각을 넓혀보면 이 두 가지가 인류 진화의 양대 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일각수(유니콘)에 빗대어 풀고 있다. 그러나 가만 보면 죽음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일각수처럼 잔꾀에 당하거나 스스로를 내던지는 목숨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자연사가 드문 야만의 시대에 대한 일갈이다.

오늘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4주기다. 이 시는 김충규 시인이 생전에 그를 추모하며 쓴 시로 보인다. 비타협적이던 한 자연인이 리더가 되고나서 겪었던 고뇌를 일각수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생몰년에서 알 수 있듯이 김충규 시인은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 시처럼 그도 다만 사라질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안상학 시인·artandong@hanmail.net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