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책사·친구 통해 재구성한 현대사 뒷면…『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입력 2013-05-18 08:00:00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안경환 지음/ 까치 펴냄.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고, 한고조 유방에게 장량이 있었다면, 한국 현대사의 거인 박정희에게는 황용주가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동기인 황용주(黃龍珠'1918~2001). 부산일보 주필이자 편집국장이던 1960년 황용주는 군수기지사령관이 돼 부산으로 내려온 박정희와 재회한다. 그리고 이들은 가난한 나라와 부패한 정치를 탄식하며 군사정변을 모의한다.

"총을 들고 일어난 군인들 중에는 권력욕을 채우려 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혁명을 부추긴 황용주에게 혁명은 민족을 구하기 위한 엘리트의 자구행위였다." - 들어가는 말 요약-

박정희와 황용주 두 사람이 공유했던 신앙은 '국가와 혁명과 나' 삼위일체의 교리였고 민족통일은 신성불가침의 지상 과업이었다. 황용주는 문학청년이자 학병 장교였으며, 5'16쿠데타의 주역이자 정수장학회의 입안자였다. 박정희와 황용주에게 군사쿠데타라는 비정상적인 행위는 원대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한 정당하고도 불가피한 수단이었다. 그렇다고 황용주를 군부독재 신봉자로 평가한다면 이분법적 오판이다.

황용주는 언론인 시절 김주열(4'19혁명 희생자)의 처참한 시신 사진을 독점 보도하지 않고 전 언론사에 풀어 혁명 열기에 기름을 부었고 조봉암에 대한 '사법살인'을 질타했다. 자유당 시절 이미 야간 통행금지를 반대한 자유주의자였고, 대한민국 국민이기 이전에 한반도 주민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통일주의자였다. 동시에 쿠데타 결행을 설득한 '5'16의 공모자'였다.

도식적 잣대로 황용주와 그의 시대상을 재단하려는 시도에 대해 지은이 안경환 교수는 "글을 쓰는 지난 수년 동안 새삼 나의 세대의 무지와 후속 세대의 경박한 오만에 절망하곤 했다"며 섣부른 재단의 위험을 지적한다.

쿠데타 성공 후 황용주는 문화방송 사장까지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64년 11월 필화사건에 휘말려 추락했다. 월간 '세대'에 기고한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라는 글이 국회에서 야당 의원에 의해 정치 쟁점으로 비화됐던 것이다. 이 글에서 황용주는 남북한 불가침 약속, 군비축소와 극소수 유엔 경찰군의 남북 경계선 주둔, 유엔 동시가입, 제3국을 통한 남북대화를 제안했다. 이 글로 반공법 위반판결을 받았으며, 혁명동지 박정희로부터 강제 격리당하고 평생 야인으로 살았다.

황용주는 평생 두 사람을 사랑했다. 한 사람은 자신이 동경했던 불란서(佛蘭西)에서 이름을 딴 외동딸 란서(蘭西)였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빛이자 그림자인 박정희였다. 인생 후반기 황용주의 삶은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과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친구(박정희)에 대한 애도로 채워졌다. 여든두 해 생을 마감하던 날 그가 온 힘을 다 모아 토해낸 말은 "아 정희야! 아 란서야!" 두 마디였다.

황용주의 박정희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의 정체는 역사적 공범의식이었다. 어떤 면에서 황용주는 자신이 본체이고 박정희가 분신이었다는 자부심까지 갖고 있었다. 조선을 개국한 정도전이 그랬던 것처럼.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자 황용주는 '위대한 생애였다. 44세에서 62세까지 한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는 증인으로서 흡족하고 감탄…' 이라고 썼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누구를 생각하면서 여생을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적었다.

지은이 안경환은 서울법대 교수로 부임한 직후 황용주를 찾아 타계할 때까지 교류했다. 이후 10년 이상 그의 일기를 소장하면서 황용주의 일생에 대한 평전을 집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지은이가 황용주의 일기에서 확인한 것은 격동기를 산 한 지식인의 정열적인 사랑과 사상이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황용주의 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한국 현대사의 이면에 해당한다. 황용주를 통해 박정희를 바라보며, 박정희를 통해 격동기 한국 현대사를 조망하는 것이다.

511쪽, 2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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