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재의 은퇴일기] 갑으로 살아온 은퇴자

입력 2013-05-18 08:00:00

버스 타기, 은행 가서 입출금하기, 집주변 마트에서 생활용품 사오기, 주민센터에서 인감증명서 발급받기, 팩스 보내기, 우표 사서 편지 부치기….

사회생활 적응 프로그램 같지요. 아닙니다. 갑으로 살아온 이들이 은퇴하면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거의 탈북자 수준이지요. 직급이 올라가면서 작은 일도 남의 손에 맡기며 살아온 이들에게 은퇴 후 생활은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때론 당혹스럽기까지 하지요. 버스를 타도 카드를 어디에 갖다 대야 하는지 모릅니다. 남 따라 엉거주춤 비슷하게 했다가 망신당하는가 하면, 1만원짜리 내고 잔돈 받으려다 몇 시간씩 버스를 타고 있어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자신의 업무에는 최고의 수준인지 모르지만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어설픈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마누라 뒤를 쫄쫄 따라다녀야 하는 이유이지요. 그럼에도 어디를 가나 '이건 이렇게 해야 되고 저건 저렇게 잘못됐다'고 지적합니다. 아내들은 피씩 웃고 말지요. 버스조차 탈 줄 모르는 사람이 똑똑한 척하는 모습에 어처구니없는 것이지요.

갑으로 살아온 은퇴자들의 어려움은 이것뿐 아닙니다. 아무도 반기질 않습니다. 남의 소소한 잘못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남을 대접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법은 모르면서 상대방은 대놓고 무시합니다. 오죽하면 절대 창업해서는 안 될 사람 1순위가 대기업에서 갑 노릇 오래한 사람이겠습니까.

갑이니 을이니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갑도 을도 아닌 은퇴자의 입장에서 보면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직장을 나와 보면 모든 게 '한때'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슈퍼갑도 어느 누구에게는 을이 되고, 을도 어느 순간 갑이 되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갑의 직업을 가졌다고 그 사람이 갑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앞서 보듯 갑으로 살며 누린 것들이 오히려 제2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을로 살았다고 인생 전부가 을이 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업무상 갑으로 살아가는 나'와 '진짜 나'를 혼동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 구별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은퇴 후의 많은 날들이 참으로 힘들어지니까요.

김순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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