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팔공산 은해사는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친필 현판 전시장이라 할 만큼 많은 추사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
은해사와 성보박물관 및 부속암자인 백흥암에는 '불광'(佛光)'대웅전'(大雄殿)'보화루'(寶華樓)'은해사'(銀海寺)'일로향각'(一爐香閣)'산해숭심'(山海崇深) 등 추사 글씨의 편액과 주련(기둥에 세로로 써서 붙이는 글씨)이 남아 있다.
1847년(헌종 13년) 실화로 극락전 외에 대부분 소실되는 참사를 겪은 은해사는 1849년 중창 불사를 마무리한 뒤 추사의 글씨를 받아 현판으로 새겨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상으로 추사가 1849년 제주에서의 유배에서 풀려나 64세의 나이로 서울에 돌아왔을 때쯤 불광, 대웅전, 보화루 등의 현판 글씨를 써 준 것으로 추정된다.
1862년(철종 13년) 혼허 지조 스님이 쓴 '은해사중건기'에는 '대웅전, 보화루, 불광각의 세 현판 글씨는 모두 추사의 묵묘(墨妙)라 마치 화엄누각 같다'라고 했다. 또 1879년(고종 16년) 영천군수 이학래가 쓴 '은해사연혁변'에는 '문의 편액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의 글씨이며 노전(법당 맡아보는 사람의 숙소)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라고 기록돼 있다.
추사는 어떤 인연으로 은해사에 많은 현판 글씨를 남겼을까?
간송미술관장을 지낸 사학자 최완수 선생은 그의 명저 '명찰순례'에서 추사와 은해사의 인연을 ▷화엄학의 대가로서 글씨에 조예가 깊었던 영파 성규(1728∼1812) 대사의 옛터 ▷추사의 진외고조인 영조의 어제완문 보관 등으로 추측했다.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는 1847년 은해사 대화재 후 불사를 일으킨 당시 주지 혼허 스님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추사에게 부탁해 현판 글씨를 받았다고 했다.
한편,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이달 1일부터 31일까지 제1종 전문박물관 등록을 기념해 '추사 김정희 현판 글씨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불광'을 비롯해 '대웅전''일로향각''산해숭심' 주련 6점 등을 선보인다.
추사는 당시 주지의 부탁을 받고 만족할 만한 작품을 얻기 위해 벽장 속에 가득할 정도로 '불광'이라는 글씨를 많이 썼다고 한다. '대웅전'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데다 강한 필획을 갖춘 추사체로 평가받고 있다. 최완수 선생은 '대(大) 자와 전(殿) 자 사이에 웅(雄) 자를 조금 작게 써서 강약강의 신묘한 조화를 보인 것도 추사가 아니면 이루어 낼 수 없는 참신한 공간 구성법이라고 표현했다.
영천'민병곤기자 min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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