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늙은 신병'

입력 2013-05-15 07:48:03

연대 정훈병으로 근무하던 군대시절, 제대를 6개월이나 앞두고 운 좋게도 왕고참이 되었다. 당시에는 연대본부 왕고참쯤 되면 행정반 '열외'(列外)는 기본이고 내무반에서도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가 있었다. 내무반에서 하루하루를 빈둥빈둥 왕고참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데, 본부대 서기병이 신병(新兵)을 한 명 데리고 왔다. 나이를 물으니 스물다섯이란다.

대학원까지 마치고 입대를 했다는 늙은 신병은 어깨가 뻣뻣하고 어금니를 꽉 깨문 것이 한눈에 보아도 '고문관'감이었다. 나이와 엘리트 의식은 군대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찍히는' 이유가 될 뿐. 고민 끝에 신병의 머리를 하얗게 비워주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러고는 도저히 적응이 힘들 것 같았다. 군복이 다 젖을 때까지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돌렸다. 그런 후에 물었다. "왜 맞았는지 알겠나?" "모르겠습니다!" "이유 없이 맞았다. 이게 군대다!"

당시 필자는 사병임에도 불구하고 꽤 큰돈(?)을 만지고 있었다. 장교들이 구독하던 민간 신문을 취급하면서 수완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 돈으로 주말이면 읍내에 나가 목욕을 시켜주고, 닭갈비 집에 가서 소주를 사주는 등 고참병으로서 졸병들을 사랑(?)으로 보살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패기도 잘했지만 챙기기도 잘해서 그 카리스마가 남달랐다. 인간적인 부탁을 했다. "새로 전입한 늙은 이등병에게는 될 수 있으면 인간적인 수모를 느낄 만한 체벌은 가하지 마라!"

세월이 흘러 제대 날짜가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늙은 신병의 첫 휴가일이 제대일과 겹쳐졌다. 제 고참들은 휴가를 연기할 것을 강요했지만 늙은 신병은 기어이 휴가를 떠난다고 했다. 마침내 제대 회식이 벌어지고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휴가를 떠났던 늙은 신병이 사복을 입고 나타났다. 극적이었다. 내무반원들은 일제히 박수로 귀대를 환영해줬다. 휴가 중 귀대는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에서 인제까지는 4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였다. 회식이 끝나자 읍내로 나가자고 했다. 지은 죄(?)가 있어 두려움도 있었지만 따라나섰다.

읍내 '싸롱'에 들어간 늙은 신병은 가장 비싼 양주와 안주를 시켰다. 밴드도 불렀다. 아가씨들에게 팁을 넉넉히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예 돈을 쓰려고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았다.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하려고 그렇게 말리던 휴가 출발을 감행했던가? 비록 거친 방식의 배려였지만 그걸 잊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 귀한 휴가 시간을 할애해 먼 길을 달려왔던 것을 보면. 젊은 날 남자들 세계에서 펼쳐진 뜨거운 우정의 추억 한 자락,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잊히지 않는다.

장삼철/삼건물류 대표 jsc1037@hanmail.net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