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났더니 비워지고, 비웠더니 삶의 힘이 채워지다

입력 2013-04-27 07:39:24

힐링을 찾아 내면으로 떠나는 사람들

이달 23일 대한산업안전협회 대구지회에서 열린 기업체 관리감독자 대상 교육에서 참석자들이 힐링에 대해 배우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이달 23일 대한산업안전협회 대구지회에서 열린 기업체 관리감독자 대상 교육에서 참석자들이 힐링에 대해 배우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지난해 5월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대표작 '절규'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하지만 원초적 공포 또는 고통을 극명하게 드러낸 인물은 한 명뿐이다. 나머지 두 명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다. 결국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도 그러하다. 고통과 슬픔을 밖으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어렵게 번민을 털어놓아 봤자 공감이나 위안을 얻을 확률도 낮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말한 '군중 속의 고독'(The Lonely Crowd)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최근 자신만의 깨달음을 찾아 홀로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나는 출가(出家)한다, 고로 존재한다

강제징용 피해자'위안부 할머니 등 일제 강점하 한국인의 고통과 관련한 소송으로 유명한 최봉태(51) 변호사는 올 초 잠시 '속세'를 떠났다. 오대산 월정사가 2004년부터 열고 있는 '단기 출가학교'에 다녀왔다. 한 달 동안 행자(行者) 생활을 직접 체험해보는 과정이다.

삭발염의(削髮染衣'머리를 깎고 검게 물들인 옷을 입음)뿐만 아니다. 생활 자체가 스님과 다를 바 없다. 오전 3시 30분 기상-4시 예불-5시 참선요가-청소-식사-강의 수강 등으로 이어지는 강행군이다. 군대 훈련소를 방불케 한다. 애시당초 휴양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최 변호사 역시 한 달 새 체중이 6㎏이나 빠졌다. 속세와 달리 잦은 회식도 없고, 모든 일을 손수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줄어든 것은 몸무게 말고도 있다. 욕심이다. 불가에서 이르는 번뇌(煩惱)다.

최 변호사는 "20여 년 변호사 생활을 돌이켜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올해 처음 참가했다"며 "스스로 많이 충전된 것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욱 소중하게 느끼는 계기가 됐다. 아직 끝나지 않은 소송을 잘 마무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웃었다.

안동 특산품인 '버버리찰떡'의 신형서(56) 대표는 3년째 출가 체험을 계속하고 있다.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넘게 회사를 비운다. 이 기간에는 휴대전화마저 꺼버린다. 완전한 '잠행'(潛行)이다. 업무 걱정을 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회사는 줄곧 성장세다. 올해 매출은 20억원이 넘을 전망이다.

신 대표는 "평생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문득 나 자신을 찾고 싶어졌다"며 "내가 있고 나서 사업도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 "수행 과정을 따라하다 보면 잡생각을 할 틈이 없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내'가 없어진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며 "고요한 사찰에서 동안거(冬安居)를 마치고 나면 삶의 기준이 달라진다"고 소개했다.

◆자아를 찾아 떠나는 순례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는 것은 비단 종교를 통해서만이 아니다. 대구시의회 운영전문위원(4급)으로 작년 연말 정년퇴직한 손명락(61) 씨는 지난 3월 1일 90일 예정의 단독 국토 순례를 시작했다.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출발, 동해안을 종단한 뒤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따라 파주 임진각까지 북상하는 U자형 여정이다. 지금은 전남 강진'해남 일대를 돌고 있다.

하루 30~50㎞를 걷는 동안 그는 환갑의 나이에도 미처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36년의 공직 생활을 반추해보면서 반성할 일도 적지 않고, 저절로 미소가 번지는 순간도 많았음을 알게 된다. 서너 시간을 걸었는데 아무도 만나지 못할 때도 있는 외로운 길이지만 퇴직 후 잠시나마 가졌던 박탈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무엇을 해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잡역부든 아파트 경비원이든 내 힘으로 인생 2막을 힘차게 열겠다는 각오가 새록새록 샘 솟는다.

손 씨는 "공직 생활을 대과 없이 마무리함으로써 가족들에 대한 의무는 어느 정도 마쳤다는 생각이 들어 국토 종주에 도전하게 됐다"며 "처음 시작할 때는 끝낼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지만 지금은 시작하길 잘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또 "물론 낯선 곳에 혼자 있다는 외로움은 적지 않지만 이 또한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과정일 것"이라며 "건강을 염려해 반대했던 가족들도 이제는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며 자랑했다.

학생'일반인들을 위한 체험학교인 보현자연수련원(영천 자양면 보현리)을 운영하는 조정숙(56) 원장 역시 자아를 찾아 떠나는 순례자다. 지난해 연말부터 2월 초까지 40여 일간 인도와 네팔을 돌았다. 대략적인 방문지만 정한 뒤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떠나는, 말 그대로 방랑이었다.

인도 여행은 10년 전에도 한 달 동안 했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히말라야 기슭, 다르질링(Darjiling)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는 마음 구석에 꼭꼭 숨어 있던 그 무언가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차를 마시던 중 우연히 마주한 해 질 녘 갠지스 강가의 장례 의식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줬다.

조 원장은 "참 바보처럼 살았구나, 왜 그토록 부대끼며 살아왔나라는 생각에 저절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며 "싸구려 숙소와 비포장도로를 전전하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삶의 무게는 훨씬 가벼웠다"고 귀띔했다. 아울러 "인생은 훌쩍 떠나봐야 제대로 뒤돌아볼 수 있는 것 같다"며 "재충전이 필요한 중년들이라면 한 번쯤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라"고 권했다.

◆일상에서 찾는 휴식의 기술

누구나 일탈을 꿈꾸지만 실행에 옮기기는 사실 쉽지 않다. 특히 한 달 이상의 여행 또는 종교시설에서의 체험은 일주일 휴가가 고작인 평범한 직장인'서민들에게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기 마련이다.

그래도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이시현(45'대구 수성구 황금동) 씨는 주말을 이용한 2박 3일 일정으로 민간 명상'힐링센터를 찾곤 한다. '힐링 전도사'로 널리 알려진 대구 출신 이시형 박사가 이끄는 '힐리언스 선마을'(강원 홍천),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유명한 고도원 씨가 운영하는 '깊은산속옹달샘'(충북 충주) 등이다.

이시현 씨는 "더 나은 습관을 익히길 원해 찾게 됐지만 휴양차 머무는 암 환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삶의 본질을 깨닫는다"며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스스로를 바꾸려는 노력을 계속하게 된 것이 큰 수확"이라고 전했다.

요가'필라테스'태극권처럼 움직임이 있는 명상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우주정(59) 대구시 자원순환과장은 6년째 태극권을 배우고 있다. 그는 "새벽 미사를 10년째 다니면서 태극권 수련을 함께 했더니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가 훨씬 줄었다"며 "바쁜 직장인들도 '다르게 사는 법'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단식도 마음을 채우는 '휴식의 기술'로 꾸준히 각광받고 있다. 이상학(54) 전 새누리당 경북도당 사무처장은 해마다 일주일씩 단식을 해오고 있다. 벌써 8년째이지만 단식원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진행한다. 이 전 사무처장은 "단식 기간 동안 명상을 함께 하면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느낌이 든다"며 "욕심을 줄이고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게 큰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힐링(healing) 열풍'은 식을 줄 모른다. 혜민 스님의 에세이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정신과 의사인 프랑수아 를로르의 소설 '꾸뻬씨의 행복여행' 등은 몇 달째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기업'관공서에서 열리는 관련 강좌도 항상 만원을 이룰 정도로 인기다.

명상 강사 김윤옥(50) 마음플러스행동연구소장은 "강의를 하거나 상담을 하다 보면 특히 중년 남성의 내적인 상처가 의외로 깊은 것 같다"며 "직장'가정에서의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을 관리하지 못하면 마음도 몸도 다치게 된다"고 지적했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라며 "과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접고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는 게 행복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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