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전 경쟁률 10대 1…첫 낙제 한국인 자퇴 종용하기도
1933년 3월 4일 조선공립학교 관제가 개정 공포된 뒤 대구의학전문학교(이후 대구의전)로의 전환은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다. 도립대구의원장 야마네가 대구의전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고, 의학강습소 재학생 4학년 49명, 3학년 58명, 2학년 63명, 1학년 65명 등 235명이 대구의전 해당 학년에 편입했다. 드디어 3월 8일 대구의전 개교식이 열렸다. 도립대구의원 의사들과 기초의학 교수들을 포함해 14명의 교수진이 갖춰졌고, 이들 중엔 박태환, 서승해 등 한국인 교수도 있었다.
◆대구의전 평균 경쟁률은 10대 1
대구의전으로 승격되면서 전국에서 의사가 되려는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물론 앞서 1929년에 이름만 대구의학강습소였을 뿐 입학자격과 교과과정이 의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바뀐 뒤부터 이미 입학 경쟁률은 치솟기 시작했다.
대구의전에 입학하려면 더욱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야 했다. 1930~1944년 입학시험 경쟁률을 보면 평균 9대 1을 웃돌았다. 경쟁률은 해가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였다. 1930년만 해도 208명이 응시해 61명이 합격(경쟁률 3.4대 1)했는데, 의전 승격해인 1933년과 이듬해인 1934년엔 무려 537명과 538명이 응시했다.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쟁률은 더욱 치솟았다. 응시자만 놓고 보면 1941년 695명, 1942년 784명, 1943년 941명에 이르렀다. 이때 경쟁률은 평균 10대 1을 넘어섰다.
강습소 시절 일본인 학생은 한국인의 절반 또는 3분의 1 정도였는데 비해 의전 승격 후 역전됐다. 1933~1942년 4개 학년 전체 정원이 255~288명 정도였는데, 한국인 비율은 늘 30% 안팎이었다. 입학 시 일본인 우대 정책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다만 1939년에만 이례적으로 높은 비율을 보여서 전체 288명 중 한국인이 107명으로 37.1%를 차지했다.
◆민족 간 경쟁의식 뚜렷
비록 학생 수는 한국인이 적었어도 재학 중의 학습능력이나 단결력 등은 결코 일본인 학생들에게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구의전 출신으로 경북대 의과대학 교수를 역임한 김만달 박사와 제4대 경북대병원장을 역임한 최재규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한국인 선배들은 후배들이 입학하자마자 학창생활 전반에 대한 친절한 소개를 해줬고, 신원보증'교과서 대여 등 준비과정은 물론 심지어 하숙집까지 주선해줬다고 한다. 한국인 학생 전원이 축구부가 돼 일본인 학생들로 구성된 야구부에 비해 나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 많은 연습을 거듭했고, 때로는 축구부 모임을 통해 은연중에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경쟁의식은 학습에서도 강하게 작용해서 대부분 한국인 학생들이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최재규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한 해 후배인 한국인 학생이 개교 이래 처음으로 낙제를 했는데, 모든 학생들이 분개해서 낙제 학생에게 자퇴를 종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민족 대결의식이 깔려 있었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에서 받는 교육은 비록 의전이라도 정치적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33년만 해도 교과과정에 국어(일본어) 및 조선어가 1, 2학년에 각각 2시간씩 정해져 있었지만 1939년 조선어가 제외되고 중국어가 포함됐다. 체조에 군사교육인 교련이 추가돼 학년별로 2시간씩 늘었고, 군진의학(軍陣醫學)이라는 새로운 과목도 추가됐다.
◆의사면허 자격 둘러싸고 갈등
초기 대구의학강습소 졸업생들은 비록 엄격한 입학규정과 교과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해야 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강습소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된 것이 1927년이었는데, 이때 졸업생들은 모두 자격시험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1930년 3월 도립 대구의학강습소가 정식 의학교로 지정된 뒤 졸업생들은 자격시험 없이 의사면허를 받게 됐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관할지역, 즉 조선과 만주에서만 쓸 수 있었고, 일본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이런 '반쪽짜리 의사면허'는 의전 승격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33년 3월 대구의전 제1회 졸업생(입학 시에는 의학강습소였지만 졸업 직전 의전으로 승격하면서 의전 제1회 졸업생이 됨)들에게도 이런 의사면허가 주어졌다.
재학생들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의전이지만 의전이 아닌' 모호한 차별에 대한 불만은 특히 대구의전과 평양의전 학생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특히 의사로서 일본 본토에서 개업이나 의료 활동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본인 학생들의 불만이 상대적으로 컸다. 이 때문에 재학생들은 조선총독부가 아닌 일본 후생성의 의사면허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평양의전 학생들이 성토대회를 열고 기말시험을 거부하고 나서자 학교 측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문부성에 학사자격조사를 의뢰했다. 완전한 의사자격을 줄 만한 교육이 대구와 평양 의전에서 이뤄지는지 조사해달라는 것이다.
◆1935년부터 완전한 의사면허 부여
1933년 11월 13일 문부성 파견 학사자격조사단이 서울에 도착했고, 나흘 뒤인 17일 대구의전을 방문해 하루 동안 교육여건과 학생자질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벌였다. 이때 재미있는 일화 하나가 증언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강의실에 들어가 학생 자질조사가 시작됐다. '졸업반'이다. 안내차 들어온 야마네 교장이 책상 위에 펴놓고 필기에 여념이 없는 최덕생 선배의 '노트'를 하야시 단장(자격조사단 단장, 도쿄대 명예교수) 면전에 제시했다. "아! 이거 도쿄대 학생보다 우수하구먼." 하나 둘 질문도 뒤따라 있었다. 최 선배는 수재였던 모양이다. 들은 바로는 필기하는데 일본말 사이에 독일어 술어가 섞여 있는 정도가 아니라 좀 과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어 접속사 말고는 전부 독일어로 필기했다.
당시 대구의전 학생들의 수준이 그만큼 높았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인 셈이다. 그럼에도 자격조사단은 일본으로 돌아가 ▷1933, 1934년 졸업자에게 강습을 시켜 학력을 보충할 것 ▷새로 10만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설비를 완전히 할 것 ▷1935년부터 자격(일본에서 통용되는 의사면허)을 부여함 등의 조사 결과를 총독부 학무국에 통고했다.
학교 측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1, 2회 졸업생 45명의 보습교육과 시설 및 설비 보완이 뒤따랐다. 갖가지 진통 끝에 결국 제3회 졸업생(1935년 3월 23일)부터 일본을 포함해 조선, 만주 등 일제 식민지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일본 후생성 의사면허가 발급됐다. 의전 승격 2년 뒤에야 비로소 다른 의학전문학교와 동등한 의학교육기관이 됐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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