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교직원 중일전쟁 동원
일제가 1932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자 대구의전도 전시동원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1941년 이후 태평양전쟁이 확전 양상을 띠면서 아예 전쟁을 위한 병영처럼 변질됐다.
1936년부터 야외공방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1주일씩 3, 4학년은 군부대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1, 2학년은 야영훈련을 받았다. 학생들은 집단근로작업에 동원됐고, 특설 방호단(防護團)을 만들어 학생들을 소속시켰다.
1940년엔 아예 교육목적에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양성함'이라는 말까지 집어넣어 노골적으로 일제에 충성하는 백성들로 키워낸다는 뜻을 밝혔다. 육군에서 위탁학생을 받아 직접 군의관을 키우기도 했다.
1938년 대구의전 교직원과 학생 및 졸업생이 중일전쟁에 참여한 사례도 확인되고 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중일전쟁이 발발 직후 대구의전 교직원과 재학생 및 졸업생 44명이 참여했고, 전사자도 4명이나 된 것으로 나와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이르며 다급해진 일제는 1944년 전면 징병제를 실시했다. 이로 인해 동원된 조선인은 2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구의전 교수, 학생, 졸업생들도 상당수 전쟁에 동원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전이 전시동원체제로 움직이면서 수업연한도 단축됐다. 군 보충의(補充醫)가 부족해지자 조선의 의학교육기관은 수업연한을 줄여서 1942년 3월 졸업 예정자들을 6개월 이른 1941년 9월 졸업시켰다. 이런 일은 태평양전쟁 종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대구의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3개월 정도 수업연한이 줄었다가 결국 6개월이 줄게 된다.
대구의전 9회 졸업이 1941년 3월 20일이고, 10회 졸업이 같은 해 12월 27일이었다. 3개월 정도 줄어든 셈이다. 이후 11~14회(1942~1945년) 졸업생들은 예외 없이 6개월씩 수업연한이 줄어 9월에 졸업식을 하게 됐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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