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영국병 독일병 한국병

입력 2013-04-11 11:40:10

대처 총리가 집권한 1979년 '영국병'은 깊었다. 일찍이 산업화에 성공한 영국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었다. 산업화 도시화는 도시 노동자를 양산했다. 도시 노동자들은 영국 사회주의의 토양이 됐다. 노동당을 결성한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말 보수당의 처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이후 30여 년간 영국은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다. 이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내세우며 가장 강력한 복지국가를 지향했다.

부작용은 컸다. 정부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다 보니 국민들은 스스로 할 일을 잊고 살았다. 높은 복지 수준을 유지하려다 보니 소득세 최고 세율이 한때 90%에 이르기도 했다. 노조는 파업과 협상을 통해 임금을 높여 나갔다. 고복지 고비용 저효율이 팽배했다. 독일 언론은 이를 두고 '영국병'이라 이름 붙였다.

'영국병'을 고친 것은 대처였다. 대처는 영국병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에서 절대 권력시되던 탄광노조와도 정면 대결했다. 국유화됐던 공기업을 과감히 민영화하고 복지 지출은 대폭 삭감했다. 세금도 절반 가까이 내렸다. 그녀는 "내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국민들에게 주문했다. 자신의 문제를 사회에 전가하지 말라며 사회는 없다고 주장했다. 복지는 축소되고 노조의 저항은 깊어갔지만 영국은 '영국병'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 재임 기간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46%에서 영국 역사상 최저 수준인 32%까지 떨어졌다.

영국에 대처가 있었다면 독일엔 메르켈 전 총리가 있다. 2차대전 후 라인강의 기적을 일궜던 독일은 1990년대 중반부터 근 10년 동안 이빨 빠진 호랑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1990년 독일 통일에 따른 재정 적자 증가와 과도한 복지가 역시 독일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저성장'고실업'고복지로 대변되는 독일병을 혹독히 앓고 있었다. 경제 활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언론으로부터 유럽 경제의 병자(sick man of Europe)란 비아냥까지 나왔다.

순조롭게 발전하던 독일을 위기로 내몬 것은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 투입이었다. 통일 이후 서독은 동독 재건을 위해 2조 유로 이상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한 재정 적자가 지속적으로 높아지는 상황에서 복지 지출을 늘린 것이 한몫을 했다. GDP 대비 사회보장 지출 비율은 1990년대 초 4.1%였으나 2002년 5.4%로 증가했다. 2005년 실업자 수가 500만 명에 육박했는데 이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1년 이상 실업 상태인 장기 실업자였다. 이는 과도한 사회보장 시스템 때문이었다. 성장률은 1% 이하로 떨어지고 실업률은 10%를 넘겼으며 GDP 대비 공공 부문 부채는 60%를 넘어섰다.

독일병은 이해 메르켈 총리의 집권을 계기로 수술대에 올랐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 첫 여성 총리로 취임한 후 가장 먼저 복지 혜택을 줄였다. 소득세와 법인세율을 낮추고 실업급여도 축소해 경제 활력의 돌파구 마련에 나섰다. 메르켈의 개혁은 독일병을 극복하는 계기가 됐다. 독일은 최근 몇 년간 지속되고 있는 유럽 재정위기 속에서 튼튼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로 휘청대던 그리스에 가장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도 독일이다.

우리나라도 한국병이 깊다. 북핵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매듭이다. 지속되던 경제는 성장을 멈추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 와중에 나랏빚은 900조 원을 넘어서 가파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복지 확대 논쟁은 증세 문제와 맞물려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

대처나 메르켈이 과다한 복지 문제를 직시하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며 복지 축소를 내세운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과감한 복지 확대 정책을 내걸고 있다. 대처나 메르켈이 세율 인하 정책을 통해 경기 부양을 꾀한 반면 박 정부는 복지 예산 확보를 위해 세금 거두기 논의가 한창이다. 이런 점에서 2007년 당내 경선 시 내걸었던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과 원칙은 세운다) 정책이 대처나 메르켈 총리의 개혁 정신에 더 가깝다. 박 정부가 한국병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하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