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2부 근대의료의 도입 <4>관립 대구자혜의원과 도립 대

입력 2013-04-01 07:18:11

남아도는 의료장비 활용…'慈惠' 가면 쓴 일본 제국주의

1930년대 당시 도립 대구의원에서 쓰던 의료장비인 태양등. 갖가지 피부질환이나 결핵 환자에게 햇빛을 대신해 광선치료용으로 쓰던 장비로 보인다.
1930년대 당시 도립 대구의원에서 쓰던 의료장비인 태양등. 갖가지 피부질환이나 결핵 환자에게 햇빛을 대신해 광선치료용으로 쓰던 장비로 보인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한 후 조선 민중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의료정책의 변화도 시도했다. 이른바 '자혜의원' 설립에 나선 것이다. 서울에 대한의원을 설립하는 한편 지방에는 자혜의원을 세웠다.

지방의 가난한 이들에게 의료 혜택을 베푼다는 의미의 '자혜'(慈惠)라는 이름과 달리 자혜의원 설립의 실제 목적은 러일전쟁 이후 조선주둔군 창고에 남아있던 의료기구와 의약품을 활용하고, 군의관들을 배치하기 위해서였다.

◆1910년, 관립 자혜의원으로 바뀜

1907년에 자혜의원 관련법이 공포되고 그해 12월 전주와 청주에, 이듬해 1월 함흥에 자혜의원이 들어섰다. 한일합방 후인 1910년 9월 '조선총독부 지방관 관제'가 발표됐다. 이후 전국 곳곳에 자혜의원이 잇따라 들어섰다.

그러나 대구와 평양의 자혜의원은 다른 도시들과는 설립 과정이 달랐다. 이미 공립 동인의원이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두 곳의 자혜의원은 조선총독부가 기존 동인의원을 매입해 인력 구성을 바꾸는 형태로 진행됐다.

조선총독부는 대구 동인의원의 건물과 대지를 3만1천700엔에 매입했다. 일반 직원과 시설은 그대로 승계해서 1910년 9월 7일 '관립 자혜의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의사들은 바뀌었다. 남아도는 군의관을 재배치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로 초기 자혜의원 원장이나 의관은 모두 현역 군의관이 맡았다. 대구 자혜의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인의원의 전임 원장 이케가미와 부원장 후지나와는 대구에서 따로 개원했다. 대신 자혜의원 초대 원장에 일등군의정 마츠모토가 부임했다. 이후 약 10년간 자혜의원장을 맡았던 마츠모토는 이후 대구에서 마츠모토의원으로 개업했다.

대구동인의원은 내과'외과'안과'산부인과를 진료했으나 대구자혜의원으로 바뀌면서 치과 진료도 신설됐다. 1910년 9월 문을 연 뒤 1년간 병원을 찾은 환자는 하루 평균 260~270명에 달했다고 한다. 1922년 기록에는 의사 및 기타 직원 75명이 근무했던 것으로 나와있다. 당시로선 매우 큰 규모였고, 피부비뇨기과와 이비인후과 담당 의사가 따로 있었다.

◆1925년, 도립 대구의원으로 바뀜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병원의 역사는 일제의 통치 수단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초기엔 겉으로 민간단체를 표방한 동인회를 내세워 병원을 짓도록 했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뤄진 뒤엔 조선총독부가 자혜의원을 세워 직접 병원을 감독했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는 무단통치를 시행했지만 10년도 채 못된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항쟁에 부딪히고 만다.

그래서 내세운 정책이 바로 '문화정치'다.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조선인에 대한 민족 차별을 없애며,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등의 유화정책을 폈다. 하지만 겉으로 내세운 것일 뿐 실제 목적은 조선 민중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을 분열'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지방자치제도 시작했는데, 이는 경북대병원 역사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일제의 지방자치제는 도'부'면 단위의 자문기관을 설치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일부 행정기능이 지방으로 이관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1925년 4월 1일 도립의원 관련 규정을 발표했다. 조선총독부 소속이던 자혜의원을 도립의원으로 바꾼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경북대병원 이전에 가장 오래 불린 이른바 '도립병원' 시대가 시작됐다.

'도립 대구의원'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기존 자혜의원의 원장'의관'교관'약제관을 비롯한 모든 직원은 도립 의원에 재임용됐다. 2대 자혜의원장이던 가미무라를 비롯해 진료과별 의사는 그대로 도립의원 의사로 남았다.

◆1928년, 현 경북대병원 자리로 이전

1926년 3월 13일 도립 대구의원은 큰 재난을 겪게 된다. 1907년 2월 10일 대구동인의원으로 문을 연 뒤 19년간 병원 본관으로 사용되던 목조 단층건물에 불이 나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 무려 13시간 동안 불 탔다고 나와있다.

화재 직후 재건축을 둘러싸고 지역 유지들 사이에서 의견이 나뉘었다. 원래 자리에 다시 병원을 세울 것이냐, 장소를 옮겨서 새로 지을 것이냐는 문제였다.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한 가운데 화재 후 보름쯤 뒤인 3월 29일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병원 이전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예산 문제가 남아있었는데 다시 한 달쯤 뒤인 4월 25일 당시 경북도지사인 사와다가 조선총독부와 논의 끝에 새로운 곳에 화재 우려가 없는 새 병원을 짓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병원 신축비용을 거두는 문제, 신축 건물의 규모 및 재질을 어떻게 할 것인지, 얼마나 넓은 땅이 필요한지 등에 대한 논의가 계속됐고, 그 결과 현재 경북대병원이 자리 잡고 있는 동운정(東雲町'현 중구 삼덕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화재 발생 후 1년 3개월 만에 새 부지에서 신축 기공식이 열렸고, 화재 후 2년 7개월 만인 1928년 10월 15일 새 병원 준공식을 갖고 곧바로 진료를 시작했다. 바로크 양식의 경북도립 대구의원은 대지 4만㎡(1만2천 평), 건평 5천900㎡(1천773평) 규모를 자랑하는 바로크 양식의 2층 붉은 벽돌건물이었다. 역시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법원, 고딕 양식의 중앙우체국과 함께 대구의 3대 건축물로 꼽혔다고 한다. 화재로 소실된 옛 병원 자리에 남아있던 건물도 새로 지은 병원의 동쪽으로 옮긴 뒤 1929년 5월 25일 대대적인 낙성식을 열었다. 전체 건평은 8천여㎡(2천429평)이었으며, 총건축비는 30만3천830엔이었다.

◆연간 진료환자 11만 명 웃돌아

신축 병원에는 외과'내과'산부인과'안과'이비인후과'피부비뇨기과'소아과 등 과별 진료실을 갖췄고 크고 작은 수술실과 함께 당시로선 최신 설비인 렌트겐실(X-선)까지 갖췄다고 한다. 1933년의 '조선연감'에 따르면, 연간 내원 환자는 약 16만 명을 헤아렸다. 이들 중에 돈을 내는 환자는 14만521명, 무료로 진료받은 환자는 1만8천665명이었다.

환자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병원 건물도 계속 새로 짓게 됐다. 1935년엔 8개 병실에 77개 병상을 갖춘 건물 한 동을 새로 지었고, 1936년에는 결핵환자 치료실 일부를 바꿔서 마약류 중증환자 치료소로 만들었다. 1937년에는 산부인과 진료실 및 수술실도 늘려서 지었다. 의료진은 원장을 포함해 15~20명 정도, 간호사는 38명까지 있었고, 약제사도 따로 있었다.

도립 대구의원에서 진료받은 입원 및 외래 환자는 매년 11만 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1937년에는 이보다 무려 10만 명이 더 찾았는데 이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경북연감에 따르면 1939년 연간 진료 환자는 입원 4만5천366명, 외래 8만2천838명 등 합쳐서 12만8천204명이었다. 도립 대구의원은 초창기인 1926년을 제외하고 매년 상당한 흑자를 기록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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