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따르릉.'
이달 26일 오후에 찾은 대구 수성구 만촌동 메트로팔레스 인근의 공인중개사 사무실.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잇따라 울렸다. "30평형대 전세물건 있나요?" "즉시 입금 가능한데 전세물건 구해주세요." 수화기 너머로 전세문의가 쇄도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을 방불케 했다. 공인중개사 권모 씨는 이사철을 맞아 전세 문의하는 전화를 받느라 다른 일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요새 아파트 전세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매물이 나오기 무섭게 계약이 되지요." 전세를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물건은 바닥이라는 게 권 씨의 설명이다. 대신 "전세를 찾으려면 1, 2개월 안에는 힘들다. 차라리 월세를 구하는 것이 빠르다"고 했다. 실제 이날 메트로팔레스의 경우 전세물건은 1건뿐이었지만, 월세는 10건에 이르렀다. 그나마 나온 전세의 경우 150㎡로 중대형 규모인데다 초고층으로 전세 수요자에겐 상대적으로 선호도가 낮은 물건이었다. 인근 다른 중개업소도 사정은 마찬가지. '전세물건이 있느냐'는 문의에 '월세를 구하는 것이 어떠냐'는 답이 돌아왔다.
◆집주인이 달라졌어요.
4년 전 1억3천만원을 주고 대구 북구 태전동의 한 아파트에 입주한 직장인 최모(40) 씨는 최근 집주인으로부터 '월세로 전환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집주인의 조건은 보증금 3천만원에 1억원에 해당하는 주택담보대출금리(연 3.8%)를 월세 형식으로 받겠다는 제안. 불과 2년 전 '전세금 2천만원을 올려달라'는 통보를 받고 집주인을 설득해 매달 10만원씩 월세를 추가로 내는 조건으로 반전세(전세+월세)형 계약을 한 터라 더욱 당황했다. 육아 문제 등으로 이사를 갈 수 없는 상황인 최 씨는 주위를 이 잡듯 뒤졌지만 전세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 씨는 불과 몇 년 사이 전세에서 반월세로, 또다시 월세로 임대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세 물량이 없어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그야말로 '슈퍼 갑'이에요. 요구하는 대로 해줘야지 별수 있나요." 최 씨의 푸념이다.
최 씨의 사례는 최근 부동산 임대시장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10년 이후 약간의 목돈을 보증금으로 내고 월세를 후불로 내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전세보증금의 일부분을 월세 명목으로 이자를 계산해서 내는 '전세 같은 월세'가 늘어나더니 최근에는 순수 월세 형태의 계약이 증가하고 있다. 또 월세를 선불로 주면서 임대하는 방식이나 일정기간의 월세를 한꺼번에 지불하는 방식도 적잖다. 최근에는 대학가 주변을 중심으로 임대기간을 6개월 미만으로 단축시킨 '초단기 월세'도 선보이고 있다.
달서구에 사무실을 둔 조성희 공인중개사는 "몇 년 전만 해도 올라간 전셋값을 감당하기 어려운 세입자들이 전셋값 상승분만큼을 월세로 바꿔 내거나 아예 5천만원이나 1억원에 보증금을 맞추고 나머지를 월세로 내는 형태의 전세 같은 월세 등 다양한 형태의 계약형태가 생겨났다. 그러나 최근에는 순수한 월세를 요구하는 집주인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집 없는 설움은 깊어지고…
월세계약이 늘어나면서 집 없는 사람들의 설움은 깊어지고 있다. 현 시세대로라면 전세는 세입자에게 유리하고 월세는 집주인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제 은행에서 전액 대출한다고 가정했을 때 집주인과 세입자는 어느 정도 득실이 있을까? 대구 수성구의 A아파트 110㎡의 경우 아파트 매매가격이 2억8천만원 정도이고 전세가격은 2억4천만원이다. 월세의 경우 보증금 3천만원에 월 110만원 정도에 계약이 이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파트 주인이 3.8%의 금리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돈만으로 아파트를 구입했을 경우 전세를 놓게 되면 매매가(2억8천만원)에서 전세값(2억4천만원)을 뺀 4천만원에 대한 대출이자 152만원을 매년 물게 된다. 반면 월세를 놓을 경우 보증금 3천만원을 뺀 금액인 2억5천만원에 대한 대출이자 950만원을 지불해야 하지만 매년 1천320만원의 월세와 보증금 3천만원에 대한 예금이자(연 4% 정도) 120만원이 생겨 전체적으로 490만원의 이익이 발생한다.
반면 세입자는 전세계약을 할 경우 전세금 2억4천만원에 대한 대출이자를 연간 912만원 내야 하지만 월세의 경우 매년 월세 1천320만원을 내고 추가로 보증금(3천만원)에 대한 이자부담(114만원)을 떠안아야 한다. 따라서 전세에 비해 522만원을 추가로 부담하는 셈이다.
이진우 부동산114 대구경북지사장은 "최근 지역 부동산 시장이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저금리 등의 영향으로 집주인들의 월세 선호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 경우 그 부담이 세입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는 문제점이 있다"고 했다. 또 "과거에는 전세를 놓고 추가 금융비용이 발생해도 매도시점에 아파트 가격이 올라 이 부분을 충족시키고도 남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최근 부동산 시장이 잠시 '반짝' 하고 있지만 전반적인 상승이 어렵다는 심리적인 요인도 집주인들의 월세 선호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세→반월세→월세
월세는 이제 부동산 임대시장의 대세가 되어 버렸다. 보증금 없이 매달 꼬박꼬박 임대료를 내는 순수 월세, 보증금을 일부 내고 일부는 월세로 돌리는 이른바 '반(半) 전세'(전세+월세) 등이 부쩍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몇 년 사이에 전세가 완전히 사라지고 반월세나 월세가 이를 대신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실제 아파트의 전세와 월세 비율은 과거 고금리 시대의 경우 8대 2 정도였으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월세 비중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올 들어서는 드디어 역전이 되고 있는 추세다. 수성구 한 공인중개업소는 "집주인들이 전세에서 월세로 바꿔 중개를 의뢰하는 경우가 꾸준히 늘고 있고, 중소형은 월세가 70%에 이른다. 전체적으로는 반월세도 10% 정도로 줄어들고 대신 순수 월세가 30~40%에 육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현상은 전국적으로 비슷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1980년 주택 전세 비중은 23.9%, 월세 비중은 15.5%로 큰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2010년에는 전세가 21.7%로 줄었고 월세는 20.1%로 상승했다. 최근 1, 2년 새 월세 비중이 더 높아지는 추세다. 올 들어서는 1월 기준 43%에 달했다.
월세 선호는 몇 년째 지속되는 저금리 현상 때문이다. 집주인들이 전세로 받은 목돈을 굴릴 곳이 마땅치 않다. 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연 4%에 미치지 못하고 여기에 이자소득세를 떼면 실질 물가 상승률보다 밑돈다. 이렇게 되자 집주인들은 전세 대신 월세를 선호하게 됐고, 그래서 임대시장에서 월세 비중이 늘고 있는 것이다.
권오인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자문위원은 "그동안 전세는 우리나라에서만 찾을 수 있는 독특한 제도로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의 이해관계가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면서 그동안 주택 임대시장에서 군림했다. 또 집주인은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전세를 끼고 집을 구매해 금전적인 부담을 줄이거나 전세금을 은행에 넣어둬 이자수익까지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물가 감안 마이너스 금리시대가 도래하면서 집주인들의 월세 선호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고 전망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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