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은 알더라, 일하러 온 사람과 즐기러 온 사람을…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
경북 안동시 서후면 이종각(48) 씨. 2007년 여름 꿈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현실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어려웠다. 사소한 농기구 장만에서부터 씨앗을 구하는 일, 무엇보다 땅을 구하는 일과 비록 고향이라도 오래 떨어져 살아온 사람들과 '결'을 맞추는 일 어느 하나 수월한 것이 없었다. 두려웠다. 그리고 주저앉고 싶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 씨는 귀농을 준비하며 설계해두었던 전략들과 농민들의 조언과 지혜를 모아 나름의 방향을 세웠다.
◆'어림'의 미학을 이용하다=이 씨가 고향에 와서 발견한 아름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어림'의 미학이었다. 초보 농사꾼들은 '어림'이라면 비과학적이고 정확하지 못한 것이라고 여겨 관심조차 없다. 그러나 '어림' 속에 누대에 걸친 경험과 체득을 통한 정확성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 씨는 모든 농사에 어림을 적용, 생산비를 계산해 내는 것은 물론 순환을 통한 농법을 알게 됐다. 그 결과 생산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한우 사육을 통해 얻어진 많은 양의 거름을 충분히 이용함으로써 퇴비나 화학비료 값을 절감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얻어진 작물 수확으로 사료비를 충족해냄으로써 소득이 일정화 됐고 순환 농법을 통해 수익의 극대화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매일의 스케줄을 짜다=귀농해서 이 씨가 놀란 사실 중 하나가 많은 귀농인이 어영부영하다 어지간한 일도 모두 남의 손을 사서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다 일의 두서가 없고 경중마저 없었다. 자연히 인건비가 늘어나고 기대에 못 미치는 수익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이 씨는 매일 해야 할 일을 시간표로 만들었다. 연간이나 월간은 말할 것도 없고 주중이나 당일의 일과표를 짜서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당연히 인건비가 줄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이웃의 일을 거들어 주고, 필요할 때 부탁하는 품앗이를 이용함으로써 최소한의 인건비도 아꼈다.
◆흙의 '결'을 알다=이 씨는 귀농 실패 원인은 섣불리 올인하는 데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패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미처 흙과의 '결'을 맞출 시간도 없이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이 진리인 양 평생 모은 재산을 투자하는 데 있었다.
고향서 만난 한 어르신은 "자기 땅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대접해 주기를 아는데 평생이 걸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밭을 대할 때면 조심스럽다. 농사 경험이 많은 사람을 만나거나 농업지도자를 만나면 묻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일반적인 토양의 성질이나 재배법은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지만 사람도 지역에 따라 사투리가 있듯, 땅도 그 지역마다 특성이 있어 그것을 정확히 통역해줄 사람은 거기 사는 사람들뿐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농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신의 땅과 '결'을 맞추는 것이라고 이 씨는 굳게 믿고 있다.
◆면사무소를 자주 가다=주위에서 면사무소를 자주 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지못해 찾아간 면사무소에서 대박이 터졌다. 귀농 이듬해 가장 고민거리인 농기계 구매를 앞두고 면사무소에 가서 상의한 결과 단돈 100만원으로 번쩍번쩍한 관리기를 비롯해 탈곡기 파종기 예취기 등이 흥부네 박속 터지듯 주어졌다. 농지 구입비 축사 신축비 등에 대해서도 아주 필요하고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니 실패했다.
귀농 귀촌의 실패는 대개 이웃과 사귀지 못하거나 사전에 철저한 준비 없이 낭만적인 생각으로 농촌으로 왔기 때문이다. 안영묵 상주시청 귀농귀촌팀 유치홍보계장은 "고향 인심이려니 하고 안이하게 대처하거나 농사 환경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단기간 승부를 보려는 욕심 때문에 실패한다"며 농사에도 프로 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소처럼 일하러 농촌에 왔나?=박모(50) 씨는 경기도에서 개인 사업을 하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다 자녀 두 명이 대학에 가면서 고향인 상주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한 전원 생활을 꿈꾸었으나 자녀의 대학 진학으로 소득이 필요해지자 상황은 달라졌다. 농업기술센터의 소개로 영농 소득이 가장 높다는 시설 오이와 한우를 기르기로 하고 시내 근교에서 시작했다. 박 씨는 꼼꼼하게 살펴보고 과감하게 시도한 것이었지만 초보 농사꾼에게 오이와 한우 농사를 동시에 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 씨는 온종일 시설 오이 하우스와 축사를 오가며 이른 아침에 오이를 따서 출하하고 소를 챙기는 생활을 시작한지 2년쯤. 구제역 파동으로 솟값은 폭락하고 시설 오이는 남들처럼 출하량이 많지 않아 하우스 난방비를 제외하면 소득이 거의 없었다. 결국 2011년 시설하우스와 축사를 서둘러 정리하고 경기도로 다시 돌아갔다.
◆이웃들이 나를 싫어해!=평소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최모(46) 씨는 농민들이 비닐 쓰레기를 아무 데서나 마구 태우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비닐을 태우면 나쁘다는 것을 이웃에게 이야기했지만 노인들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할머니들에게 큰소리치는 일까지 벌어졌고, 이 일로 최 씨는 '노인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한 번 마을 사람들 눈 밖에 나자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가장 힘든 것은 농사일을 도와줄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할머니들은 다른 집 날품팔이는 해도 최 씨 일은 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최 씨는 시내의 인력시장에서 사람을 사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게다가 최 씨 부인이 도시에 사는 친척들을 불러 몇 번 식사한 것이 '매일 도시 사람들 불러서 먹고 노는 집'이라는 소문으로 확대됐다. 이후 최 씨는 마을의 눈을 치우기도 함께하고 노인 장례식 때 상여도 메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웃들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결국 1년 반 만에 다른 마을로 이사 갈 수밖에 없었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그림:화가 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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