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대수의 풀어 쓴 풍수] 서산 정씨의 분통골 이야기

입력 2013-03-28 14:22:56

"분통골에 묘를 쓴 이후 서산 정씨들은 날로 번창해져 고관대작과 뛰어난 학자와 큰 부자가 되어 모두 잘 살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고려조의 명문사대부 집안이었던 서산 정씨들의 세력이 날로 번창하여 혹 역적모의라도 할까 봐 이유를 알아보니 분통골 묘지에 있었다. 묘를 파헤치니 빈 관이 아홉 개가 나왔다. 마지막 10번째 관에서 하얀 김과 함께 학(鶴) 한 마리가 날아갔다고 한다. 당시 풍수사는 묘를 쓸 때 꼭 관을 11개 묻되 마지막에 시신을 넣으라고 했다. 그런데 10번째 넣었으니 탄로가 났다. 한 개를 더 묻지 않은 일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지경이라 하여 이곳을 '분통골'로 부른다."

여기까지는 전설의 내용이다. 이장을 하려고 답산 요청이 있어 분통골에 갔다. 대종친회장과 부회장이면서 대학 학장을 지낸 분과 문중 인사 몇 분과 같이 현지답산 도중 후손들의 이야기는 위의 전설과는 다르다. 서산 정씨의 딸이 김씨 문중으로 시집을 갔다. 친정은 잘 살지만 시가는 가난하였다. 때마침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께서 동시 상중(喪中)이었다.

친정아버지는 부원군이었으니 한양에서 국풍이 내려와 묘지를 선정하였다. 보나마나 명당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딸이 꾀를 내었다. 밤낮 교대로 지키며 작업을 하는 일꾼들에게 친정아버지 장례 일에 고생한다면서 독한 술을 가지고 가서 마음껏 먹이고 나니 모두 취하여 잠이 든 후 밤사이 물을 길어다 가득 부어 놓았다. 다음 날 장지를 보니 광중(壙中)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상주들은 국풍에게 장지를 잘못 잡았다고 야단법석을 떠니 국풍인들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였을까?

결국 다른 곳을 찾은 곳이 필자가 가본 깊은 산골짝이었다. 필자가 보니 묘지를 조성할 자리가 아니다. 장지는 급경사요, 내외축이 각각 3m 이상이다. 필자가 볼 때 여기까지 오는 도중 한두 군데는 묘지가 될 만한 곳이 있었다. 아마 당황한 나머지 피신하다시피 깊은 골짜기 끝까지 오다 보니 더 갈 데가 없어 이 자리를 선정한 것 같다.

높은 석축도 자주 무너지고, 해마다 길을 보수하는 번거로움과 종물(宗物)도 빈약한데 경비도 만만찮아 이장을 원하는 곳이다. 친정이 잘 되면 조카가 잘되는 것이고, 시집이 잘 되면 자식이 잘되는 것이니 꾀를 부린 것이다. 버리는 땅을 얻어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이후 김씨의 후손들은 번성하고 잘 사는가 하면 서산 정씨들은 집성촌 마을도 뿔뿔이 흩어지고 후손도 번성치 못하니 이 골짜기를 보면 분통이 터져 분통골이라고 원망하는 곳을 직접 필자가 답산(踏山) 하였다.

진대수<풍수가·수필가(jds3694@hanmail.net)>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