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날도 3·1, 예식장도 만세 부른곳…반일감정에 70평생 일본여행한 적
2003년 2월 28일 오후 2시. 대구 경상감영공원은 온통 태극기와 만세 물결로 가득 찼다. 손에 태극기를 든 학생, 시민 등 1천여 명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였다. 기미독립선언문이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오자 갑자기 나타난 일본 헌병대가 단상을 점거하고 독립선언문을 강탈했다. 이에 질세라 모였던 군중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탕, 탕' 이에 놀란 일본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고 무참히 폭력을 가했다. 일부 시위대들은 굵은 끈으로 포박당해 연행되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혔던 '3'1운동'의 역사가 대구에서 84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이 행사를 되살린 숨은 공로자가 있다. 3.1운동 정신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는 전재규(76) 대신대 총장이다. 이날 전 총장은 가슴에는 태극기를 달고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은 채 3'1운동을 진두진휘했다.
이후 전 총장은 10년째 3'1운동의 역사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올바른 역사 의식을 고취시키고 민족 주체성을 재정립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3'1운동길' 발굴, '3'1운동 기념관 설립'을 추진하는가 하면 매년 재연 행사를 펼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30년이 넘게 동산의료원에서 마취과 의사로 외길 인생을 걸어오다 3 '1운동의 역사 알리기에 앞장서며 의사로 변신한 것이다. 의사(醫師)이자 의사(義士)이기도 한 김 총장을 최근 대신대에서 만났다.
◆3.1운동의 발자취를 더듬다.
의사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전 총장이 대구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1999년 계명대 동산병원 개원 100주년 편집위원을 맡으면서부터다. 당시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사료를 정리하던 중 대구지역 3'1운동의 발상지가 바로 동산병원 언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대구 사람들은 흔히 지역의 3'1운동이 서문시장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 지도에서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는 연못이었습니다. 아마 '큰장'(서문 밖 시장)을 지금의 서문시장으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큰장은 현재 섬유회관 자리에서 달성공원 인근까지였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 자료를 고증하려고 서울 등지를 돌며 자료 수집에 나섰다. 옛 문헌과 생존자들의 증언에서부터 선교사들이 주고받은 편지까지 일일이 번역해가며 정확한 대구 3'1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 나갔다. 그러던 중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여규진 선생을 만나면서 의문의 실마리가 풀렸다. "여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큰장 입구 강 씨의 소금집(현재 송월타월 자리) 달구지 위에서 오후 3시에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만세의 함성이 시작됐습니다. 종로초교(당시 희도학교)에서 찾아냈던 지도 2장에 기록된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이후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집대성해 '동산병원과 대구 3'1독립운동의 정체성'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이듬해에는 대구시에 건의해 '대구 3'1운동 길'을 지정받았다.
"대구의 만세운동은 3'1운동이 시작된 지 일주일 후인 8일 날 시작됐지만 경북 지역으로 확산하는 시발점이었습니다. 5월 7일 청도에서 마감될 때까지 두 달간 1천206명이 사망하고 3천276명이 부상당하는 희생이 따랐지요. 시민들이 대구가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인식해 자긍심을 갖고 역사를 복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뼛속까지 항일
"1944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다다를 즈음이었어요. 당시 동명교회에 다녔는데 일본군인들이 들이닥쳐 교회 종을 떼어갔습니다. 국등학교 2학년생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이 싹텄지요." 결혼 후 가슴속에서는 본격적인 반일 감정이 불붙기 시작했다. 처가에 있었던 일제 하의 고난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끝까지 신사참배'창씨개명을 거부했던 장인어른(강금주)이 자식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못하게 했어요. 아내를 비롯해 처남이 희도국민학교에 다녔는데 지각을 하는 등 여러 가지 핑계로 신사참배를 못하게 한 거지요. 결국 자의 반, 타의 반 모두 퇴학을 당했지요."
그 후 장인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옥고를 치렀다. 여름철에 입었던 옷을 한겨울에도 갈아입지 못한 채 굶주림과 추위와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실신 또 실신. 결국 일본 경찰은 거의 반죽음 상태인 몸을 인력거로 싣고 와서 남산동 자택에 던져 버렸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장인은 이후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이 같은 집안 내력 때문인지 3'1운동 정신은 대를 이어 가훈처럼 되어버렸다.
"3'1운동에 관심을 안 둘 수가 없었지요. 결혼식 날짜도 1963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일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결혼 장소도 3'1운동의 점화 장소인 제일교회였습니다. 5년 전 아들도 3월 1일 포항지역의 3.1운동이 열렸던 포항 제일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지요." 이 같은 반한 감정 때문인지 70평생 지금까지 일본 여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단다.
◆의사이자 의사
전 총장은 국내 마취통증의학의 선구자로 통한다.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클리버랜드 병원에서 국내에서는 생소한 마취과 전공의 수련을 했다. 당시 동산기독병원장이었던 마펫 박사로부터 마취과 의사로 와 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그해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 이듬해 동산의료원에서 마취과장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마취라는 분야가 제대로 알려지기 전이었지요. 외과에 눌려 힘을 못 쓰던 시대였고 항상 병원으로부터 특별 보조를 받아가며 전공의를 뽑던 시절이었어요. 마취란 이름도 마취강도, 마약밀수 등 '마'자와 관련된 사건을 마취과와 연관시키는 사회적 풍토도 못마땅했어요." '마취과의 학문을 제대로 발전시켜 우리 사회의 인식도를 높여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이후 오전 2시면 어김없이 깨어나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정년 퇴임까지 근 30년 동안 200편이 넘는 논문을 펴냈다. 대한마취과학회장, 대한통증학회장 등을 지내며 한국의 마취과 의료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의료에 윤리를 도입하기도 했다. 생명 윤리와 의료 윤리에 관심을 두게 된 후 '의료윤리학회'를 창설했으며 국내'외 의과대학에서 교육이 되고 있는 의료 윤리 내용을 광범위하게 조사'분석해 국내 실정에 필요한 '의료 윤리학' 교과서를 최초로 펴냈다.
이후 생명 사랑은 죽음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됐다. 병원 내 호스피스 사업을 의욕적으 추진하는가 하며 초대 호스피스협회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협조'대신대학교
◆전재규는?= 1938년 대구에서 태어나 계성고를 졸업하고 경북대 의대와 대학장로회 신학교(대구신학교 전신)를 졸업했다. 미국 템플 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 계명대 의과대학 학장, 한국의료윤리 교육학회 회장, 한국 호스피스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척추마취의 임상'·'임상산과마취'를 비롯해 '의료윤리학'''호스피스총론'''의사의 눈으로 본 십계명', '대구 3'1독립운동의 정체성' 등 윤리'종교'역사와 관련해 40여 권의 저서가 있다. 2009년부터 대신대 총장으로 있다. 이달 1일 민족정신 고양과 시민 자긍심 고취에 기여한 공으로 대구시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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