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 읽는 놈, 한 번 읽는 놈 중 누가 이기노?"
아버지는 1960년대까지 1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인 경북 영천의 한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셨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1970년대 초 대구로 이사를 했지만 몇 년 후 병환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렇다.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품이셨다. 집안에서는 우리 가족들에게 무섭고 엄한 아버지셨고, 마을에서는 각종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앞장서셨다.
아버지는 힘든 농사일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공부를 잘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야 이놈아! 책을 열 번 읽는 놈하고, 한 번 읽는 놈하고, 누가 이기노?"라고 늘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내 머릿속 깊이 '1등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새겨 준 것 같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우리 가족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가훈을 만들었고, '하면 된다'는 좌우명으로 살았다. 나는 35년간 공직에 몸담았고, 지금은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할아버지의 바람대로 손녀(딸)는 교사의 길을, 손자(아들)는 의술을 펼치며 열심히 살고 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마침 매일신문 주간매일 독자카페 코너에서 '아버지'라는 글제를 던져줘 46년 전 아버지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과 함께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참 기쁘다. 아버지! 이제 후손들 걱정은 떨쳐 버리시고, 어머니와 함께 즐겁고 편히 지내세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최주원(대구 동구 불로동)
▶늦둥이에게 동화 같은 추억 선물하신 아버지
아버지 나이 40세 때 다섯 공주 중 막둥이인 나를 얻으셨다. 또래 친구들과 비교하면 할아버지처럼 늙으신 아버지. 그게 나는 좀 불만스럽기도 했다.
아버지는 유년시절 나에게 여러 가지 경험을 하도록 해 주셨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가야금을 배우러 다녔다. 아버지는 내 키 높이의 무거운 가야금을 늘 직접 운반해주셨고, 덕분에 나는 양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아버지랑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걸을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햇살에 비친 아버지 얼굴이 밝게 빛난 것은 생생하다.
피아노도 배웠다. 아버지는 새벽이면 나를 깨워 직접 업고, 학원 앞까지 데려다 주셨다. 아버지의 지극 정성에 나는 감히 학원에 가기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올해로 아버지는 87세가 되셨다. 요즘 귀가 어두워지셔서 당장 의사소통이 막연해졌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엄마가 아버지의 '대변인' 역할을 하시는 걸로 만족해야 하는 현실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대신 꿈에서 내 유년시절의 아버지를 뵙기도 한다. 아버지의 따뜻한 등을 느끼고, 빙그레 웃으시는 얼굴을 떠올리고는 한다.
내게 동화 같은 추억을 선물해주신 아버지. 지병 없이 건강하셔서 감사하고, 항상 푸른 하늘빛 감정이입으로 내 마음의 여백을 따뜻하게 채워 주셔서 또한 감사하다.
조복래(경북 칠곡군 왜관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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