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는 영혼이 없다." 노무현 정부의 한 고위 관료가 막스 베버의 말이라고 소개해서 유명해진 문구다. 그래서 이 말의 출처라는 베버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훑어봤지만 눈이 밝지 못한 탓인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베버의 다른 저서를 뒤져봤더니 다행히 그와 비슷한 문구를 찾을 수 있었다.
"관료는 분노도 편견도 없이 그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정치가, 지도자 및 그의 추종자들이라면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것, 즉 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 관료의 명예는 그의 상급자가 그가 보기엔 잘못된 명령을, 그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고수할 경우 명령자의 책임을 떠맡아 그 명령이 마치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듯이 성심을 다해 정확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소명으로서의 정치' 최장집 엮음'박상훈 옮김) 쉬운 얘기도 어렵게 말하는 학자 특유의 난삽한 표현이지만 쉽게 풀이하면 "관료는 머리를 비워야 한다. 자기 생각과 달라도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설사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는 프로이센 관료제를 관찰해 얻은 특수한 시기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의 관료에게서도 읽을 수 있는 보편적 속성이다. 노무현 정부 때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지금은 은퇴한 정치인에게서 들은 얘기다. 당시 건강보험 재정 개혁을 위한 대책안을 제출하라고 했더니 갖고 오는 보고서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과는 달랐다. 그래서 여러 번 퇴짜를 놓은 끝에 원하는 보고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왜 공무원은 이런 식으로 일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알아본 결과 희한한 현상을 발견했다. 공무원들은 정책을 입안하면서 서로 다른 대안을 여러 개 마련해 놓고 장관의 눈치를 살핀다는 것이다. 첫 번째 안이 퇴짜를 맞으면 두 번째 안을 내놓고 그것마저 퇴짜를 맞으면 또 다른 안을 내놓는다고 한다. 이처럼 시기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맞춤형' 정책 대안 생산 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곧 관료는 설사 소신이 있어도 상급자의 소신과 배치될 때 자기 소신을 꺾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상급자의 판단에 따라 최선의 대안이 사장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박근혜 정부의 관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관료 전성시대를 연 박근혜 정부가 걱정스러워지는 이유의 하나다.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장'차관급 고위직의 74%가 전문 관료 출신이다. 이처럼 관료를 중용한 이유는 전문성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배제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문제는 자기주장 없는 전문성은 베버가 말한 '무영혼'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란 점이다. 더구나 그 앞에 가면 누구도 감히 거슬리는 말을 하지 못하는 대통령이고, 그 대통령이 '국정 철학 공유'를 강조하고 있으니 그런 우려는 더 커진다. 전 정부에서는 SSM(기업형 슈퍼마켓) 규제를 반대했다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찬성한다고 한 전직 관료가 경제부총리가 되고, 대통령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진으로 핸드폰 고리를 장식한 '비리백화점' 장성이 국방장관이 됐을 때 '국정 철학'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어떨지는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창조경제'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의문은 자연스럽다. 무엇이 창조경제인지 국민은 아직 잘 모른다. 융합이니 어쩌니 말의 성찬만 있을 뿐 그것으로 무엇이 창조되는 것인지는 안갯속이다.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창조는 누가 하는가. 박 대통령의 구상을 미뤄 짐작해 보건대 아마 기획재정부가 밑그림을 그리고 미래창조과학부가 창조하는 것인 듯하다. 참으로 난센스다. 창조는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규제 칸막이를 치고 규정을 따지는 관료제 어디에 그런 정신이 깃들 여지가 있는가. 그런데 때와 장소에 따라 소신을 바꾸는 사람에게 창조를 디자인하게 하고 관료들을 줄 세워 창조를 하겠다고?
관료의 무영혼은 상급자가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 일사불란한 정책 집행으로 오히려 더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상급자나 지도자의 판단이 잘못됐다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이런 걱정과 의문 제기가 무지한 자의 괜한 트집이라면 용서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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