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2월 21일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미국의 팬암 여객기가 테러로 폭발해 탑승자 전원이 숨진 것이다. 범인으로 리비아인 2명이 지목됐다. FBI는 리비아의 권력자 카다피에게 테러범 인도를 요구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보복에 나선 유엔 안보리는 리비아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외교적 경색 상황이 길어지자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나섰다. 1990년 만델라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동행해 카다피를 면담한 끝에 테러범 신병 인도를 이끌어낸다.
대구의 국악계 인사 P씨로부터 이와 관련한 비화를 들었다. 카다피는 처음에 완강했지만 만델라의 설득이 반복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재를 받아들이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만델라는 빙그레 웃었다. "우리나라에는 위대한 시인 졸라니 음키바가 있다. 그가 당신을 위한 시를 짓도록 주선하겠다." 뜻밖의 제안에 카다피는 파안대소했다. 더 이상의 협상은 불필요했다. 만델라의 약속대로 음키바는 카다피를 위한 헌시를 지었다. 음키바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개막식 때 "아프리카인들이여,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쓴다!"라고 낭송해 이목을 끈 바로 그 사람이다. P씨는 남아공 초청 공연을 갔다가 음키바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만델라야말로 최고의 협상 전문가인 것 같다. 그는 자존심이 지나칠 정도로 강한 카다피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훤히 꿰고 있었다. 몇백억 달러의 돈다발을 테이블 밑으로 은밀히 들이미는 따위의 '수'를 부리지 않았다. 대신 소통하려 했다. 일찍이 카다피가 국제사회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 있을 때 그는 말했다. "미국과 유럽 모두 남아공의 흑인들을 버렸을 때 우리를 도와준 것은 카다피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지 50일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 신정부 출범 이후 6개월 정도 관행적으로 지속되던 야당'언론과의 '허니문'이 일주일 만에 실종됐다는 소리가 들린다. 각료 내정자들이 줄줄이 낙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혹자는 인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참모진들의 치밀함과 능력 부족 탓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고 있다.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원칙'과 '불통' 중 어느 것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리지만, 지금까지는 우려가 더 도드라져 보인다. 한 매체가 청와대 및 새누리당 출입 기자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였더니, 응답자의 54%가 대국민 소통을 개선하기 위한 우선 과제로 '대통령의 소통 의지 피력'을 꼽은 것을 봐도 그렇다.
위계질서가 중시되는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은 '아부의 장막'에 갇혀 민심과 단절되기 십상이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지역의 한 지방자치단체장은 이렇게 술회했다. "당시 대통령 특명에 따라 안가(安家)를 없앴다. YS는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그랬지만 이후로 대통령은 청와대에 '고립'되고 말았다."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안가가 필요한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국정 최고 책임자에게 직언을 전달할 수 있는 물리적'심리적 공간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육영수 여사가 그랬던 것 같은 청와대 내 야당 역할을 할 만한 인사가 눈에 잘 안 띈다.
박 대통령은 밤 시간대 청와대에서 거의 홀로 지낸다. 깜깜한 밤의 청와대는 접근하기 어려운 탑일지 모른다. 미국 애니메이션 '라푼젤'(2010년)에서 공주 라푼젤은 병을 고치고 젊음을 유지케 하는 신비의 머리카락을 갖고 태어났다. 이를 탐낸 마녀가 아기 라푼젤을 납치해 높은 탑에 가둔 뒤 어머니 행세를 한다. 마녀는 겉으로는 사랑을 주는 척하면서 라푼젤이 세상에 나가는 것을 막는다. 우연한 기회에 탑에서 내려온 라푼젤은 모험 끝에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권력'으로 치환시켜 보자. 대통령에게 임기 5년은 고뇌와 외로운 결정의 시간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권력만 좇는 정치꾼들을 경계해야 한다. 소통의 정치인 만델라는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도 자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다. 만델라와 카다피. 엇갈린 길을 간 두 정치 지도자를 보면서 소통을 기반으로 한 리더십의 중요성을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