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들 '점령' 소통 단절…'반짝 거주' 얼굴도 몰라
이달 15일 오후 대구 중구 삼덕동 경북대병원 남쪽 동덕초교 부근. 이곳은 1998년 대구에서 처음으로 담장 허물기가 시작된 곳이다. 하지만 수십 년 된 주택이 즐비한 '마을'의 흔적은 사라진 채 '퉁퉁 탕탕' 연장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건물 기초에 시멘트만 겨우 마른 한 건물 앞에서는 지번이 찍힌 지도를 든 두 남성이 신축 중인 건물과 주변 원룸 건물을 번갈아 가리키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동덕초교 후문 반경 50m 범위에 신축 중인 원룸만 3개다. 최근 2년 내 신축된 원룸 건물의 대리석벽에는 '원'투룸 임대' '전'월세 주인 직접' 등 표지판만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주민 박보경(85'여) 씨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원룸 입주민들은 서로 인사도 없이 바쁘게 지나친다"며 "낯선 사람들이 자리 잡는 이 동네 풍경이 각박하고 불안하다"고 말했다.
◆사라지는 마을 공동체=담장 허물기로 이름을 알린 삼덕동 곳곳에 원룸이 들어서면서 '마을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다.
수십 년 된 주택과 고목 냄새가 나는 식당 등 나지막한 건물이 전부였던 이곳이 최근 2, 3년 사이에 반사유리와 차가운 대리석으로 덮인 원룸촌으로 변했다.
도심에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다는 입지적 요인 때문에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임대수익을 노리는 건설업자도 늘어났다. 도시형 생활주택 등을 보급하기 위해 건축자금 저금리 대출을 시행하면서 원룸 건축을 부추겼다. 이자율이 연 3~4%인 주택담보대출이나 연 4~15%에 이르는 신용대출 등에 비해 건축자금 대출의 경우 지난해까지 연 2%대로 현저히 낮은 상태가 계속됐다. 임대 수요가 높은 이 지역의 경우 일단 지어서 여러 개로 쪼개 임대 수익을 챙기려는 건설업자들의 러브콜이 잇따르자, 주민들은 낡은 집을 팔고 동네를 떠났다. 오래된 집이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전'월세 덕분에 이곳에 머물던 사람들도 집이 팔리자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갔다.
경북대병원 건너편 진석타워 빌딩과 경북대 치과병원 안쪽 골목도 사정은 마찬가지. 똑같은 모양의 원룸 건물 사이에 군데군데 남아 영업을 하는 몇 개의 식당만이 이곳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대신 유리와 대리석이 주재료인 4, 5층 높이의 건물이 길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높은 건물 때문에 골목은 대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웠다. 적게는 20실 남짓부터 많게는 50여 실에 이르기까지 건물의 크기는 달랐지만 주차장이나 부동산 사무실 등을 둔 건물의 구조는 대체로 비슷했다.
공인중개사 김영선 씨는 "인접한 경북대병원, 치과병원과 각종 사무실 등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 등이 많아 임대수요가 많은 편이며 진석타워 부근의 원룸 건축이 포화상태에 다다르자 경북대병원 쪽으로 옮겨오고 있다"며 "이곳은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원룸 등 다가구주택 건설업자들이 투자 목적으로 주택 등을 매입한 뒤 신축 원룸을 임대해 수익을 올린다"고 말했다.
◆무분별한 원룸 신축 막아야=남아있는 주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대화와 소통이 단절된 동네에 '뜨내기'들만 가득한 원룸 이웃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임대한 건물에서 영업하고 있는 인근 식당 등 업주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 식당을 운영하는 김지은(46'여) 씨는 "계약 기간이 남아있는데 건물주가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며 "부근을 들쑤시고 다니며 건물주를 설득하는 원룸 건축업자들 때문에 권리금, 보수비 등 엄청난 투자비용을 회수하기도 전에 가게를 비워줘야 할까 봐 걱정이다"고 말했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무분별한 원룸 건축을 지양하자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담장 허물기 사업으로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대구 남구 대명동 부근도 한때는 원룸이 많이 들어섰던 곳이지만 최근에는 원룸 건축이 주춤한 상태다. 담장을 허물고 정원을 공원처럼 꾸며 이웃 주민들의 교류와 화합이 늘어나자 마을 만들기 사업에 비중을 둔 것. 남구의 경우 2011년부터 원룸 건축허가 요건을 강화해 30㎡이던 면적기준을 40㎡으로 높이고 주차면수도 가구당 0.5대에서 1대로 늘렸다. 주민 이영란(55'여'대구 남구 대명동) 씨는 "곳곳에 원룸이 들어서던 4, 5년 전에 비해 동네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며 "담장을 허문 뒤 오가는 이웃과 인사하고 대화할 수 있게 돼 이제야 '마을주민'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사무국장은 "무분별한 원룸 건축으로 이웃 간 교류가 단절되고 익명성이 높아지고 서민들의 주거환경이 악화되고 있다"며 "건축업자들이 자본을 앞세워 마을 공동체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관계기관에서 건축허가를 엄격히 하고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현기자 everyda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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