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아빠, 텅 빈집에 홀로…나 '새' 된거야?

입력 2013-03-16 07:35:25

유학 간 자식·아내 부양 남은 男들의 슬픈 자화상

최근 한 시트콤에서 외국에 있는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만년과장
최근 한 시트콤에서 외국에 있는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만년과장 '기러기 아빠'의 극 중 안타까운 모습.

이달 5일 대구에서는 50대 의사 A씨가 방 안에 번개탄 8개를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아내에게 남긴 것으로 보이는 유서에는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 딸을 잘 부탁한다'며 '딸이 아빠의 자살을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A씨는 2003년 딸과 아내를 미국으로 보내고 혼자서 10년째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10년 넘은 기러기 아빠 시대

기러기 아빠. 1990년대 후반 국내에 조기 유학 열풍이 불면서 널리 알려진 단어다. 아내를 딸려 어린 자녀를 해외로 유학 보내놓고 국내에서 혼자 생활하는 아빠를 가리킨다. 평소에는 돈을 벌어 교육비와 생활비를 보내고, 1년에 한두 번씩 가족을 만나러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생활 모습이 철새인 기러기와 닮았다며 붙은 명칭이다.

조기 유학은 10여 년 전부터 한국사회 교육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교육과학기술부 자료에 따르면 초'중'고 조기 유학생 숫자는 1998년 1천562명이었던 것이 꾸준히 증가해 10년 뒤인 2008년 18배 늘어난 2만7천349명을 기록했다. 재정경제부 자료에 따르면 2003년 이미 10만 명을 넘어섰다는 통계도 있다. 최근 조기 유학생 규모는 경기 침체와 저출산을 이유로 하락세로 돌아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국내 교육 당국 및 주요 조기 유학 국가인 미국 출입국 통계에 따르면 매년 1만여 명 규모의 한국 출신 조기 유학생이 꾸준히 출'입국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가족 위해 희생하는 아빠의 대명사

사실 기러기 아빠는 이전부터 있었다. 가수 이미자가 1969년 발표한 '기러기 아빠'는 1960, 70년대에 가족을 남겨두고 중동 건설 현장과 월남전으로 돈 벌러 떠난 아빠들의 아픔을 담은 곡이다. 가사는 이렇다. '산새도 슬피 우는 노을진 산골에. 엄마 구름 아기 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서 살고 있나.'

이때부터 수많은 아빠가 엄마와 아기와 떨어져 혼자가 됐다. 먹고 살만 해진 1980년대에는 교육을 위해 자녀와 아내는 대도시로 가고, 직장을 위해 아빠는 떨어져 사는 주거 형태가 나타났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부터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찾아 대도시가 아닌 외국으로 자녀와 아내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무너진 공교육과 치솟는 사교육비'라는 국내 교육 문제가 흔히 거론된다.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자녀의 더 나은 삶을 위한 뒷바라지=막연한 부모 희생'이라는 수식이 튀어나온다. 김성숙 계명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기러기 가족이 자녀에게 하는 교육 투자의 특징은 경제적으로 전 재산을 쏟아 붓는 '과도한 투자'이면서 전 가족의 생애를 다 바치는 '희생적인 투자'이다. 하지만 결국 장래에 대한 뚜렷한 목표가 없는 '불확실한 투자'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막대한 유학 비용 부담에 신음

"아이 교육에 대한 투자만큼 확실한 노후 보장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이기적인가요? 그러면서 아이도 커서 명예와 부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거죠. 5년 전 외동아들과 아내를 캐나다로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멋진 가장이 된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계획보다 유학 기간이 길어지면서 유학 비용 송금 부담에 치이기 시작했습니다. 환율이 요동치면 시쳇말로 '멘붕' 상태가 되고요. 저축해둔 돈을 빼내 쓰다 2년 전에는 아파트를 팔고 원룸을 얻었습니다. 어차피 혼자 사니까요. 현재 저축은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있는 사업도 힘들어 노후보장은커녕 당장 생계가 아슬아슬합니다."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50대 기러기 아빠 박모 씨는 매년 4천만원에 가까운 돈을 가족에게 부치고 있다. 기본 생활비에 교육비, 그리고 주기적으로 특별 과외비 등이 든단다. 그런데 3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뒷바라지 기간이 아이가 원해 연장된 데다 경기 침체로 최근 돈 마련이 쉽지 않단다.

경제적 부담을 호소하는 기러기 아빠가 적잖다. 이들은 처음에는 경제적 여유를 자랑하는 중산층이었다. 하지만 중산층 붕괴 추세에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막대한 유학 비용을 감당하기 벅차 신음하고 있다.

통계청의 가계동향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산층 비율은 1990년 75.4%에서 2010년 67.5%로 얇아졌다. 그런데 상위소득층으로 올라서기보다는 상황이 나빠진 중산층이 많다. 남상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달 발표한 '우리나라 중산층의 규모와 변화 추이 분석' 논문에서 "1990년대에는 중산층 대부분이 상위소득층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2000년대에는 중산층이 저소득층으로 떨어지는 빈곤심화 및 양극화 현상이 진행됐다"고 했다.

◆치솟는 외로움은 점점 두려움으로

"딸과 아내를 미국으로 보낸 뒤 처음에는 저에게 '황금 기러기'라는 별칭을 붙일 수 있을 정도였죠. 여행도 다니고, 취미활동도 하며 중년의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사실 결혼 20년차 정도 되면 누구나 혼자이고 싶어 하지 않나요? 그런데 두 달 정도 지나니 생활 자체가 안 되더라고요. 구겨진 와이셔츠 차림에 청소 안 한 집안 냄새가 배는 지 밖에 나가면 '홀아비 냄새 난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죠. 퇴근하고 텅 빈 집 현관문을 여는 것도 점점 두려워져요. 두려움을 잊으려 친구나 부하직원들 불러 술 마시는 것도 하루 이틀이죠."

생활 속 불편과 점점 치솟는 외로움을 호소하는 2년차 기러기 아빠로 법조계에서 일하는 40대 조모 씨. 그는 실은 "딸과 아내가 다시 돌아올 몇 년 뒤가 가장 걱정"이라고 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서로 공유하는 관심사도 줄어들고, 딸은 '아빠와는 이제 말이 안 통한다'고 하고, 딸과 아내가 점점 남이 돼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이러다 서로 남이 돼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 정신적으로 가장 힘이 듭니다."

기러기 아빠들이 정서적으로 겪는 이런저런 문제를 대중매체에서는 이미 그려내고 있다. 매일 소주잔 기울이며 눈물 흘리게 하는 외로움의 문제는 단막극에서, 아내와의 불화로 인한 이혼 등의 문제는 '사랑과 전쟁' 등 부부 문제 재연극에서 소재로 쓰고 있다. 최근 한 시트콤에서는 회사에서 고군부투하며 자녀의 유학 비용을 벌었지만 늘 가족에게 홀대받다 끝내 '과로사'한 만년과장 기러기 아빠의 모습이 그려져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곧 '자살'을 선택하는 기러기 아빠의 모습이 영화나 드라마 속에 그려질지도 모를 일.

김성숙 교수는 "경제적 책임을 온전히 떠맡은 기러기 아빠들은 강박관념으로 말미암은 스트레스가 매우 심하다. 기러기 아빠들의 정서적 문제 해결을 위한 전문 상담프로그램이나 직장 내 커뮤니티 등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유학 지에 있는 가족들이 아빠의 어려움에 대해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자세가 절실하다"고 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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