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마나 머리를 틀고 평야를 적시는 낙동강
상주시 은척면은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속리산 끝자락인 성주봉 아래에 자리 잡은 곳. 국내에서 유일하게 동학 관련 유물이 보존된 상주 동학교당이 있고, 은자골 전통된장과 맛좋은 막걸리도 이곳에서 만든다. 오전 9시 40분 600번 '상주-외서-은척'행 600번 버스를 타고 길을 나섰다. 아찔한 절벽 위로 우산재(231m)를 구불구불 감고 도는 길은 멀미가 날 정도다. 전날 내린 싸락눈은 오전까지 쌓여 있었다.
◆희미하게 뛰고 있는 동학의 맥
40분을 숨 가쁘게 달린 버스는 은척면 버스정류소에서 숨을 고른 뒤 황령리로 향했다. 5분 정도 더 타고 있다가 동학교당 주차장 앞에서 내렸다. 질퍽하게 녹은 싸락눈을 밟으며 200m가량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옹기종기 모여앉은 초가집들을 만난다. 상주 동학교당이다. 초가집 대문 앞을 얼쩡거리는데 장화를 신은 촌로와 마주쳤다. 김정선(63) 은척면 우기리 이장이었다. 그는 동학교당 남접본부 접장이라는 직함도 갖고 있다.
상주 동학교당은 1924년 김주희(1860~1944) 선생이 건립한 동학본부다. 건물은 모두 5채로, 동서남북으로 초가집 4채가 배치됐고,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현재는 김 이장 가족들이 살며 건물 전체를 관리하고 있다.
허허벌판이던 이곳은 동학교당이 세워지고 교인들이 모여들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상주와 문경은 물론, 충청도와 강원도까지 포교한 내륙지방 동학교당의 중심지였다. 동학경전인 동학가사를 간행하는 등 출판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곳이기도 하다. 교세가 커지자 일제는 교인들을 끌고 가 고문하고 탄압했다. 김주희 선생도 옥고를 치르다 후유증으로 1944년 세상을 떠났다. 이곳 유물전시관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동학 유물이 남아있는 장소다. 당시 동학의 복식과 경전'휘장'목판 등 유물 177종, 1천84점이 전시돼 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불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문을 가마니로 가리고 제작한 경전들이다. 1943년 일제에 의해 모든 경전과 유물, 가사집 등이 압류당했다가 유물이 소각당하기 직전에 광복되면서 기적적으로 되찾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학교당은 130여 가구가 모여 살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인 대부분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그래도 매년 여덟 번씩 지내는 제사인 '8대 헌성'에는 안동과 영주'봉화'예천 등지에서도 교인들이 찾아온다.
유물전시관을 보려면 사전 예약해야 한다. 김 이장 혼자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을 개방해뒀는데,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고는 문을 그냥 열어두고 간 거예요. 열린 문으로 개와 고양이, 심지어 너구리까지 들어와 애를 먹었어요. 화장실 문을 안 닫고 가서 수도관이 전부 얼어 터지기도 했고."
동학의 명맥은 거의 끊어진 상태다. 동학의 종파는 30여 개에 이른다. 종파 간의 교리나 지향점이 다르고 분열된 상태다.
그는 "전북 고창이 녹두장군 전봉준의 성역화가 된 것에 비해 경상도는 동학이 경주에서 태동했는데도 등한시되고 있다"고 푸념했다.
◆은자골, 맑은 물로 담그다
동학교당을 나와 국도를 따라 200m가량 걸어가면 햇볕을 쬐고 있는 100여 개의 장독을 만난다. 전통 방식으로 된장, 고추장, 간장을 만드는 김정민(62)'권옥자 씨 부부의 제조장이다. 이곳에는 장독뿐만 아니라 토종벌도 친다. 김 씨가 부직포로 꽁꽁 싸맨 양봉 벌통 수십 개를 손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동학교당 김 이장의 동생이다.
김 씨가 전통 장류를 만들기 시작한 건 10년 전이다. 서울에서 귀향해 시작한 일이 전통 장류를 만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터를 잡은 이곳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민족종교인 동학과 전통 음식인 된장'고추장이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했죠."
장 담그기는 11월 하순에서 12월 초에 시작한다. 콩은 계약 재배를 통해 주변 지역에서 조달하고 물은 지하 100m에서 퍼올린 암반수를 쓴다. 커다란 무쇠 솥에 불린 콩을 쪄 메주를 만들고 60일 동안 잘 말린 뒤 음력 정월이 되기 전에 장을 담근다. 항아리 안에는 숯과 고추, 대추 등도 넣는다. 매년 장을 담은 항아리만 100여 개 이상이지만 전 과정은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이렇게 모인 장독이 700여 개. 가장 오래 묵힌 장은 10년이 넘었다.
"장맛은 물과 공기, 햇볕이 만들어냅니다. 일단 장을 담그고 나면 나머지는 자연에 맡겨요. 장독 안에 손을 넣어보면 한여름에도 한복판은 차가워요.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썩지 않는 겁니다."
김 씨는 "돈은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팔리지 않으면 그냥 묵히면 되니까요. 급한 마음을 먹으면 전통 방식을 고수할 수가 없어요."
물 좋은 은자골에 유명한 것이 또 있다. 다름 아닌 은자골탁배기다. 은척면사무소에서 개천을 따라 걷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은척양조장이다. 사무실은 시큼한 술냄새가 진동했다. 약속을 하지 않고 찾아간 탓에 임주원(54) 대표는 만나지 못했다. 대신 조카사위인 정용헌(39) 총무가 공장을 안내했다.
"은자골 막걸리의 가장 큰 장점은 재료가 좋다는 거죠. 쌀은 상주에서 난 삼백쌀을 씁니다. 서너 시간 전에 찧은 것만 사용하죠. 자체 개발한 누룩과 물엿을 사용하고요. 물은 지하 100m에서 끌어올린 청정 지하수를 씁니다."
은척양조장의 역사는 194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 대표의 시아버지인 고 이동영 씨가 매형의 양조장을 넘겨받아 본격적으로 막걸리를 빚었다. 임 대표가 처음부터 막걸리 사업에 뛰어든 건 아니었다. 시아버지는 양조장을 물려받으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7년간의 고민 끝에 가업을 내려받았다. 임 대표는 발효 기술을 개선해 뒤끝이 좋지 않은 기존 막걸리의 단점을 보완하고 유통기간을 늘렸다. 이곳의 연간 매출은 40억원 수준으로 대구 불로막걸리에 이어 대구경북에서 두 번째로 많다.
정 총무는 "막걸리 붐이 일었지만 지금은 사그라진 상황이에요. 막걸리의 수준이 소비자들의 기대에 못 미쳤던 거죠. 품질 좋은 막걸리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간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다."
◆경천대를 지나 의성으로
은척면에서 오후 1시 35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다시 상주로 돌아왔다. 오후 2시 40분 경천대로 가는 버스를 탔다. 경천대까지는 30~35분 정도가 걸린다.
경천대는 낙동강 1천300리 중 제1경으로 꼽힌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500m가량 걸어 오르면 경천대 관광지다. 매표소에서 300m가량을 걸어 휴게소를 지나면 왼편에 경천대 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있다. 너른 계단으로 만들어져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돌담을 따라가면 군데군데 정성스레 쌓은 돌탑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무지산(159m) 정상에 지은 3층 전망대에 올라서니 절벽을 휘돌아가는 낙동강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강은 산을 만나 머리를 틀고 평야를 지나 산맥의 품으로 스며든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다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표지판을 따라 230m가량 내려가 나무 계단을 지나면 경천대에 다다른다. 기암 사이를 뚫고 나온 소나무를 등지고 바위 위에 서면 시퍼런 낙동강이 발밑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경천대 옆으로 내려가면 정기룡 장군이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먹이통이 있고, 바로 옆에는 우담 채득기(1604~1646) 선생이 만든 무우정이 정취를 더한다. 무우정에서 오솔길을 따라가면 강변 절벽 위에 드라마 '상도' 세트장이 발길을 잡는다.
흔들다리를 건너 위로 올라가면 왔던 길로 되돌아가거나 강변으로 내려가는 길로 갈라진다. 강변으로 내려가면 상주 자전거박물관 경천교와 마주치고, 비봉산 동봉 정상까지 갈 수 있다. 더 걸어볼까 싶었지만 버스를 놓치면 큰일. 발길을 되돌려 조각공원을 둘러본 뒤 경천대 관광지 입구로 나왔다.
이곳에서 의성으로 넘어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오후 5시 55분 막차를 타고 예천 풍양면까지만 가기로 했다. 풍양에서 의성군 다인면은 그리 멀지 않다. 숨 가쁜 환승이 이어졌다. 막차를 타고 사벌면사무소 앞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6시 3분. 20분을 기다려 중덕행 500번 버스를 타고 풍양면에 도착하니 오후 6시 40분. 이미 사방은 어둠이 깔린 뒤였다. 글'사진 장성현기자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