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학의 시와 함께] 공백이 뚜렷하다-문인수(1945~)

입력 2013-03-07 07:49:19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인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주일이, 한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시집 『적막 소리』(창비'2012)

아주 좋은 난해시는 문자와 문장 앞에 진퇴양난이고 아주 좋은 이해시는 속뜻과 여백에 들어서는 속수무책이다. 난해시는 길이 보이지 않는 무중이고 이해시는 여러 갈래 길이 저마다 뚜렷해서 아연하다.

이 시는 아주 좋은 이해시다. 독자들을 일사천리 무혈입성 시 속으로 흡입한다. 뭐 이리 싱겁냐고 시의 내실로 들어서는 순간 대략 난감이다. 정작 시의 안주인은 천 갈래 만 갈래 삶의 진경을 펼쳐 놓고는 슬쩍 자리를 비켜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진짜 시의 맛을 보는 것이다. 온갖 불편한 것들을 무장해제하고 푹 무질러 앉아 진경 속을 마음껏 노닐어 보는 것이다. 눈물 부류들은 손수건을 건네받을 것이고, 절망 종류는 희망으로 교환될 것이다. 아주, 각자의 경우에 알맞게, 꼭 그만큼. 편한 사람은 속이 깊은 법이다

시인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