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기록, 역사 그리고 진실

입력 2013-03-06 11:22:07

며칠 전 아들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미래에는 역사학자가 사라지겠네?" 장래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문득 역사학자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역사학자가 사라지다니 무슨 말일까?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의 논리는 이러했다. 옛날에는 사라지고 지워진 기록들이 많으니 그것을 찾고 해석할 역사학자가 필요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기록이 컴퓨터와 인터넷에 남게 되면 역사학자가 할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국회 청문회가 떠올랐다. 불과 몇 해 전 기록이 버젓이 남아있는데도 '그럴 리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기록이 잘못됐다'며 딱 잡아떼는 이들의 궁색한 변명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것도 장차 국정을 책임질 '훌륭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역사의 거짓'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한 외과의사는 수술 계획을 잡기 전에 반드시 환자에게 '집 나이'를 다시 물어본다. 연세가 지긋한 환자일수록 꼼꼼히 물어본다. 이유인즉 주민등록상의 나이와 집 나이가 다른 경우가 워낙 흔하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상 70대 후반인 한 환자의 경우 실제 생물학적 나이, 즉 진짜 나이를 알고 보니 80대 초반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비록 네댓 살 차이에 불과하지만 연로하고 쇠약한 노인 환자의 경우, 수술 결과나 회복 속도에서 적잖은 차이를 나타낸다.

한 개인의 역사조차 이렇듯 출발부터 달라질 수 있을 터인데 하물며 기관이나 단체의 역사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경북대학교가 역사 찾기에 나섰다.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고 폄훼하는 사람도 있지만 제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경북대는 대구사범대학,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이 국립대학으로 승격한 1946년을 개교 연도로 삼고 있다. 올해는 경북대 개교 67년이 된다.

그런데 최근 경북대 개교를 23년 거슬러 올라간 1923년으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근거는 그해 9월 경북대병원의 전신인 도립 대구의원에 '대구의학강습소'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경북대 의학전문대학원의 전신에 해당한다. 이렇게 되면 경북대 역사는 올해 90주년이 된다. 이를 연구하는 관련 교수 모임도 수차례 열렸고, 논란도 많다. 이 때문에 일일이 논지를 거론할 필요는 없다.

한편 조사 중에 경북대병원의 시발점인('경북대병원 90년사'에 근거) 대구 동인의원에서 학생을 교육하고, '동인의학교'에 필요한 갖가지 교육비 약 5억 원을 대한제국 정부 예산으로 지원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이 때문에 경북대 의대 출발점을 1907년으로 봐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만약 이런 논리가 인정받는다면 경북대의 역사는 106년이나 된다.

서울대도 2010년 이런 진통을 겪은 바 있다. 그 결과 개교(開校) 연도는 현재처럼 1946년으로 두되, 근대 교육기관이 세워진 1895년을 개학(開學) 연도로 정하기로 했다. 경북대가 개교 67년, 90년, 106년 사이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새삼 역사 찾기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현재 본지에 연재 중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때문이다. 지난해 연재를 준비하며 지역 의료사에 대한 기록이 턱없이 부족함을 새삼 절감했다. 100년이 훌쩍 넘는 근대 의료 역사를 지녔지만 체계적으로 이를 다룬 책 한 권이 없다.

서울에서 발간된 의료사 서적에서 지역 의료사는 한두 페이지에 불과하다. 메디시티를 주창하는 대구에서, 근대 의료 100년을 논하는 대구에서 의료사학을 연구한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의 역사도 지워진다. 기록이 뻔히 남아있음에도 이를 부인하고 오히려 시각을 문제 삼는 사람도 있다. 과연 기록의 진정성은 흐르는 세월 속에도 퇴색하지 않고 남아있을까? 주민등록 나이와 집 나이가 다른 노인들의 경우,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면 결국 남는 것은 기록뿐이다. 돌아가신 날을 기억하겠지만 태어난 날은 점차 잊힌다. 진실과는 다른 기록만 남게 될 뿐이다. 앞으로도 역사학자가 할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아들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