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불 꺼진 창

입력 2013-02-28 14:12:44

그리운 거문도 다시 찾아가 항각구국 한 그릇 들이켰으면…

거문도를 떠올릴 때마다 아득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건 '그립다'와 '가기 어렵다'는 현실이 맞부딪칠 때 혼성 듀엣으로 들려오는 의식의 소리다. 백여 개의 바위 군락인 백도를 끼고 있는 거문도는 육지에서 제주도보다는 분명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을 떠올리면 두 배나 더 먼 거리로 느껴져 더욱 아득해질 뿐이다.

언뜻언뜻 떠오르는 생각 속에 보고 싶은 것의 그림자가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언뜻 생각'의 묽고 진한 농도에 따라 그리움은 짙어지거나 엷어질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고 싶은 이의 초상이 뇌리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으면 '그 집 앞'을 서성이거나 '불 꺼진 창' 밑에서 '딜라일라'를 불러야 한다. 그러나 나의 그리운 상대는 주로 '자연 속의 풍광'이기 때문에 소극적인 방법으론 구제받을 수 없다. 그래서 배낭을 꾸려 들메끈을 졸라매고 길을 나설 도리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어릴 적엔 세월이 그렇게 빨리 달아나지 않는다. 세월의 속도 자체를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고 아내와 아이가 생기고 얼굴에 주름살이 자신도 모르게 깊어지기 시작하면 세월의 무게와 부피를 느끼게 된다. 그것도 모자라 황혼에 가까워오면서 서녘의 나무 그림자들이 키를 키워 갈 무렵이면 세월의 속도는 조급함으로 바뀌게 된다.

어린 시절 강둑에서 달리기를 하면 강물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그 강둑에서 강물과 뜀박질 시합을 하면 강물이 뒤처지고 주자인 자신이 앞서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20대는 시속 20㎞, 60대는 60㎞, 80대는 자신이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지,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지도 잘 구분하지 못하면서 과속에 걸려 스티커를 여러 장 끊기게 된다.

서부영화를 보면 황야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타고 온 인디언이 갑자기 멈춰 서서 자신이 달려온 먼짓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을 때가 있다. 그건 너무 빨리 달리다 보니 미처 따라오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라고 한다. 나는 내가 앞서 달리고 있는지 아니면 인디언의 영혼처럼 뒤따라오고 있는지도 모른 채 숨 가쁘게 달려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다.

황혼이 배경으로 깔린 무대에 서 보니 황야에서 멍하니 흙 먼짓길을 돌아보는 인디언처럼 걸어왔던 길이 되돌아 보일 때가 있다. 여태 살아오면서 많은 산과 바다, 그리고 여러 섬들을 헤집고 다녔지만 아직 안 가 본 곳과 한두 번 가 본 곳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거문도가 추억의 갈피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와 '빨리 달려와 딜라일라를 불러보라'고 채근한다.

그리움의 대상이 사람일 경우 그리움의 실체는 영과 육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정신과 육체는 둘 다 너무 소중하여 어느 것이 먼저라고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육체를 도외시하는 아가페적 사랑은 고귀하긴 하나 너무 싱거워 무덤덤하다. 그러나 육체의 쾌락을 동반하는 에로스적인 사랑은 생명 창조의 근원이긴 하나 때론 무질서 속의 남용이 짜고 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음식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의 뇌는 '구운 고기와 레드 와인'을 함께 먹었을 때 쾌락을 평가하는 두뇌 부위가 훨씬 활성화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여행과 마찬가지로 음식에서도 변화와 다양성을 함께 추구한다. 16세기 유럽에 고추가 보급되기 시작하자 매운맛이 인체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음식의 조미료로 고추가 헤로인의 자리를 굳히게 된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내인성 아편'이 분비돼 신체가 달릴 때 느끼는 쾌감(runner's high)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곧 기쁨과 중독의 경계라고 흔히 말한다.

꽤 오래전에 '산 친구' 몇몇과 거문도에 간 적이 있다. 배를 타고 백도를 한 바퀴 돌다가 심한 풍랑을 만나 널브러진 개구리처럼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우린 그날 저녁 거문도의 명물 항각구국을 먹기로 했는데 속이 울렁거려 반도 못 먹은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다. 항각구국은 야생 엉겅퀴를 삶아 팍팍 치대 쓴맛을 우려낸 다음 된장에 버무려 싱싱한 갈치국에 넣어 젓국으로 간을 맞춰 끓인 기가 막히는 음식이다.

"샛바람에 혼쭐이 났구먼. 이거 항각구국이나 한 그릇 마셔 부러, 금시 내려갈 테니께." 벼르다가 아직 못 가고 있는 거문도엘 가야겠다. 그 항각구 식당의 불이 꺼져 있더라도 가서 '딜라일라'를 한 곡조 뽑아야겠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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