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닐 터이다.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복잡다단한지는 달력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유명 인사도 아니고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건만 메모 칸이 빌 때가 좀체 없다. 슬퍼할 일과 축하할 일이 씨줄 날줄로 얽혀 있는데다 그저께는 가족 여행으로 남해까지 다녀왔다. 겹친 일정으로 피곤했던지 오늘은 소파에서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낮잠이 든 것이다.
얼마나 잤을까. 햇빛이 눈부셔서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밖은 바람이 부는지 행인들이 걸음을 재촉하는데 정남향의 거실에는 햇볕이 따스하다. 잠은 깼으되, 기지개만 켠 채로 소파에 한참 누워 있었다. 햇볕과 나른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재미 삼아 나의 행복을 챙겨볼 때가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하찮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때나 뜨겁게 샤워할 수 있는 것,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것, 언제라도 술 같이 마실 친구들이 있는 것 등이다. 이제는 햇볕 또한 여기에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문득 작은 움직임이 느껴져 베란다로 눈길을 돌렸다. 군자란 한 송이가 지금 막 피어 올라오고 있다. 아침까지만 해도 입 다문 봉오리였다. 바로 지금, 그러니까 내가 소파에서 낮잠 든 사이 부지런히 날갯짓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후딱 자리에서 일어나 화초들 앞에 앉았다. 아파트의 화초에게는 시간이 입력되어 있지 않은 것일까. 밤에만 꽃이 피는 야래향은 나뭇잎을 떨구기 시작했는데, 아이비나 스킨다부스는 기름이 돌면서 새 잎이 돋는다. 앙증맞은 강아지똥은 줄기부터 말라 들어가고 있는데, 철없는 영산홍은 의기양양하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나는 잠깐 이 모든 생성과 소멸에 슬픔을 느꼈다. 무겁지 않은, 가볍고 달콤한 슬픔이다.
TV는 뭘 하나. 버튼을 눌렀다. 일본인 맹인 청년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 쓰지이 노부유키다! 국제피아노 콩쿠르 최초의 맹인 우승자가 탄생했다는 소식이다. 나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빨려들 듯이 화면을 응시한다. 연주를 마친 노부유키가 엉거주춤 일어난다. 관객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 만약에 눈을 뜬다면 무엇이 제일 보고 싶으냐고 사회자가 묻는다. 부모님, 친구들, 별, 바다, 그리고 불꽃놀이라고 대답한다. 여기저기에서 눈물을 닦는 관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도 휴지를 뽑아 코를 푼다. 세상에나! 이 모든 아름다운 일들이 축복처럼 지구 한쪽에서 일어났다. 내가 잠든 사이에.
小珍/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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