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관계 없어야 '전문건설' 뿌리 내린다
대구에서 전문건설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A씨. 얼마 전 턴키로 공사를 딴 원청 업체의 최저가 입찰에서 낙찰됐지만, 최종 적격 심사에서 탈락했다. 공사비 외에 계약에 없는 갖은 명목비를 낼 수 없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그는 "말이 최저가 입찰이지 발주자의 입맛에 맞는 업체가 선정된다. 낙찰을 받고도 면접 심사에서 떨어진 꼴"이라며 울분을 삭였다.
대형 건설사들은 막대한 자본력과 고급 인력을 활용한 수주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기술자와 인부를 고용하고, 장비 사용 계약 등 현장을 움직이는 일은 전문건설업체 몫이다. 전문건설업체가 시장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건설시장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대형 건설사들의 우월적 지배, 불공정 하도급 등이 여전해 전문건설업계가 불황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대형 건설사 횡포 여전
지난달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종합건설업체 254개 사를 대상으로 '민간 건설공사 불공정 실태조사'를 한 결과 '민간 건설공사 표준도급 계약서를 사용하지 않거나 변경해 사용하고 있다'는 건설업체들이 45.3%(115개 사)에 달했다. 발주자가 갑(甲)으로서의 불공정 계약 관행을 강요하는 경우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도급 계약을 맺은 건설업체가 선급금을 받지 못한 경우도 조사 대상의 절반이 넘는 55%에 달했다. 공사 완공 후 공사대금을 받지 못한 경우도 39%나 됐다.
특히 전문건설의 경우 민간건설공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주자 중심의 불공정 계약으로 인해 공사대금을 제때 받지 못하거나 아예 떼이는 업체들과 협력사들이 상당수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건설협회 조사 결과 2011년 상위 20대 종합건설업체 하도급계약 325건 중 86.5%(281건)가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수정'변경하거나 미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대부분 시공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부담 항목(민원처리비, 야간작업비, 산재처리비 등)을 현장설명서(견적특수조건 등)에 포괄적으로 명시, 추가 비용부담을 전가하는 편법을 사용했다. 발주처에 통보한 하도급 산출내역서 항목과 실제 하도급 계약서에 첨부된 하도급 산출 내역서를 서로 다르게 작성하는 '이중 계약서'도 빈번하다.
업계 관계자는 "덩치가 큰 종합건설사가 불공정 거래와 계약을 강요해도 영세한 전문건설업체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보상받을 곳도 없다"고 한탄했다.
◆건설의 뿌리인 전문건설 살려야
종합건설업체 수(작년 기준)는 1만1천489개로 국내 전체 건설업체(6만208개)의 19.1%를 차지한다. 반면 이들로부터 하청을 받는 전문건설업체 수는 전체의 63.2%인 3만858개에 이른다. 나머지는 전문건설업체와 구매 및 임대 계약을 하는 자재'장비업체들이다. 건설업계 종사자가 100만 명에 육박하고 건설업체 대부분이 중소형 업체인 것을 미뤄 볼 때 전문건설사들은 건설 산업의 뿌리다.
대구도 대구건설협회에 소속된 회원은 300여 업체인데 전문건설 업체는 3배가 넘는 1천여 개에 달한다.
대기업의 부당한 계약 요구와 대금 미지급, 추가비용 부담 등 불합리한 요소와 이를 감시할 시스템 부재는 전문건설업체가 견디기 어려운 장애물이다. 게다가 정부의 실적공사비 적용대상 확대, 최저가 낙찰제 등 방침으로 전문건설업체의 고통이 이중삼중으로 가중되고 있다.
대한전문건설협회에 따르면 부도를 맞거나 폐업한 업체는 지난 2011년 모두 2천612개였다. 2008년 2천369개 업체를 기록한 이후 매년 2천 개가 넘는 업체가 시장에서 사라지고 있다.
전문건설협회 대구시지회 관계자는 "최저가 입찰제 등 절차상 공사 수주 등이 투명해졌을 뿐 정작 보이지 않는 큰 기업들의 횡포는 여전하다"고 밝혔다.
◆건전한 건설 고리 이어야
건설 경기를 지피려면 건전한 건설 사다리가 제대로 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특히 종합건설업체와 전문건설업체 간 왜곡된 건설 고리를 바로 잡아야 한다.
하도급에 의존하는 전문건설업체는 대형건설사와 종속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탓에 원청업체가 흔들리면 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구조다.
지난해 말 현재 100대 건설사 중 23개 업체가 법정관리 또는 워크아웃을 겪고 있지만, 이들에게 딸린 하도급 건설사 수는 200여 배인 4천여 개 사나 된다. 계약 액수만 11조3천여억원이며 직접적인 피해를 본 하도급업체 수도 2천900여 개 사다.
지역 전문건설업체 한 관계자는 "원청 업체들이 법정관리 신청 등으로 회생의 길을 모색할 때 정작 대금을 받을 길이 없는 하도급 업체들은 줄도산 사태를 맞고 있다"고 했다.
업계에선 정치권과 정부의 부양책과 함께 ▷하도급 대금 우선 변제 장치 마련 ▷외상 매출채권 담보대출 상환청구권 폐지 ▷표준품셈 현실화 ▷전문건설업체가 원도급을 받을 수 있는 소규모 공사 확대 ▷공정하고 투명한 하도급 입찰 시스템 도입 등을 요구하고 있다.
전문건설협회 대구시지회 김민호 과장은 "근로자의 직접고용 주체인 전문업체는 임금 및 장비대금 지급 등에 따른 원가 압박과 종합업체의 불공정 행위로 생존 위협을 받고 있다"면서 "공정한 하도급 거래와 적정 공사비 보존 등이 선행돼야 건설업계가 함께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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