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사만어] 간디와 종북주의자

입력 2013-02-19 07:12:21

효자 친구의 조언으로 아버지 잠자리를 따뜻하게 해드리려고 아버지 이부자리에 들었다가 혼만 나고 쫓겨난 불효자 얘기는 정치 세계에도 들어맞는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반체제 운동이나 반정부 활동도 상대가 무지막지하지 않아야 숨 쉴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원래는 '진리 위에 굳게 섬'이라는 뜻이나 보통 '비폭력 무저항'으로 번역된다)를 들 수 있다. 간디의 상대는 식민 지배자였지만 적어도 미치광이는 아니었던 영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를 예리하게 간파한 이가 조지 오웰이다. 그에 따르면 간디는 19세기에 태어나 현대적 개념의 전체주의의 본질, 그것이 구축할 가공할 세계가 어떤 것일지 이해하지 못했다. 간디는 구식의 불완전한 독재만을 상대했을 뿐 전체주의 국가를 대면하지 않았다. 그런 구식의 독재 체제에서는 적어도 자신을 바깥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세계를 자극할 수 있다'는 간디의 믿음은 실현 가능하며 실제로 그의 전략은 세계의 여론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의 투쟁은 히틀러의 독일이나 스탈린의 러시아, 3대 세습의 북한에서는 절대,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세상의 여론을 환기시키는 전략은 당사자가 무엇을 하는지 세상 사람들이 들을 기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 "반체제 인사가 한밤중에 사라져 영원히 소식을 들을 수 없는 나라에서라면, 간디의 방식이 먹힐 수 있겠는가? 언론과 집회의 권리가 없는 곳에서는 외부 세계에 호소하는 것은 물론 대중운동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에 러시아에는 간디 같은 인물이 있을까?" 이러한 물음은 간디를 폄훼한 것이 아니라 자유 민주 체제가 반드시 수호해야 할 지고(至高)의 가치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티아그라하에 대한 오웰의 문제 제기는 국회의 북한 핵실험 규탄 결의안 표결을 보이콧한 통합진보당의 종북주의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보이콧에 대해 '대화가 없었다'는 등 갖가지 구차한 이유를 늘어놓지만 진짜 이유는 '이념의 조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임을 국민은 안다. 그런 충성심 표현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반체제 인사가 한밤중에 사라져 영원히 소식을 들을 수 없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만으로도 남과 북 중 어디가 사람 살 곳인지, '게임 끝'이다. 통진당 종북주의자들은 종북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한민국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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