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그 맛 늙지 않는 생명력
이달 8일 오후 대구 중구 서문시장. 이곳에는 대구에서 유명한 옛날과자집이 있다. '과자집'이라 하니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과자로 지은 집을 떠올리면 좋다. 판매대 가득 펼쳐 놓은 각종 전병'유과'강정 등 80여 가지 옛날과자를 쌓아 올리면 정말로 집 한 채는 지을 수 있을 정도다.
"하나씩 드셔 보세요!" 이곳 주인은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구수한 목소리로 시식을 권유했다. 따로 시식용으로 내놓은 것이 아닌 판매 중인 과자 한두 조각을 부담 없이 집어 맛보면 된다.
이곳이 동화 속 과자집과 다른 점은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을 끈다는 것. 설 연휴를 앞둔 터라 평소보다 손님이 많았는데 대부분 중'장년층 이상이었다. 중절모를 쓴 노신사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부채과자를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 이 과자점 직원은 "특히 저녁 퇴근길에 수천원어치 정도를 사는 중장년층이 많다"고 말했다.
◆추억으로 먹는 옛날과자
옛날과자는 구제패션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후반 세계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복고바람을 타고 유행했다. 그러더니 한때의 유행을 넘어 '추억 제품'으로 정착하면서 관련 시장도 형성됐다. 처음에는 '불량 식품'이라는 인식이 다소 있었지만, 요즘은 불황에 저렴한 간식이나 웰빙 주전부리로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같은 날 중구의 한 백화점 식품 매장에서도 옛날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판매대에 적힌 제품 설명에서 고급화, 좋은 재료, 웰빙 등의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제품은 주로 강정이나 유과 종류인데 찹쌀'메밀'아몬드'해바라기씨'백년초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품목을 다양화한 것이 특징이었다. 일본어로 '센베이'라 불리는 전병 선물 세트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브랜드도 있었다. 연말연시'명절'어버이날에 선물용으로 많이 팔린단다. 옆에서는 익히 알려진 고급 과자 선물인 한과 세트도 판매하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봐도 옛날과자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쇼핑몰이 수십 곳 뜬다. 소량은 물론 경로잔치 등 행사용 대용량 제품도 판매하고 있었다. 대체로 3㎏에 1만원이 조금 넘는 '착한 가격'대다.
◆한때 침체기 겪은 과자
사실 과자는 가까운 슈퍼마켓이나 대형마트에 가면 더욱 쉽게 찾을 수 있다. 대부분 제과업체에서 만든 '스낵'이라 불리는 과자 제품들이다. 그런데 지금 진열대에 살아남기까지 나름 우여곡절의 역사를 갖고 있다.
엄마를 조르고 졸라 구멍가게에 가서 기어코 과자를 맛보던 아이들은 1990년대 중반쯤부터 과자에 대한 관심을 조금씩 줄이기 시작했다. 햄버거'피자'치킨 등 다른 간식이나 외식거리가 넘쳐나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것. 1995년 4월 한 신문기사에서는 "1994년 1조2천억원 규모를 기록한 국내 과자 시장은 이제 커질 대로 커진 포화상태다. 수입 과자의 시장 잠식도 가속화하고 있다. 주 고객인 신세대의 입맛이 복잡다단해지고, 취향의 변화 속도도 빨라졌지만 제과업체들이 이를 정확히 파악해 신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설'추석 등 명절이나 어린이날'크리스마스'생일 등에 어린이들이 받던 '종합선물세트'도 1990년대 중반부터 점차 사라졌다. 종합선물세트는 각종 과자 제품은 물론 장난감도 들어 있어 아이들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현금이나 게임기 등 다른 고가의 선물을 찾으면서 제과업체들은 앞다퉈 생산을 중단하기 시작했다. 당시 업계 자료에 따르면 종합선물세트 매출은 1991년 310억원이었던 것이 1996년 150억원으로 줄었고, 지금은 따로 집계가 안 될 정도로 찾기 어려워졌다.
◆시장 주름잡는 장수 브랜드 과자들
이런 가운데 기어코 살아남아 '장수'를 뽐내는 것은 물론 높은 매출을 올리는 과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서 살펴본 옛날과자와 마찬가지 원리다. 제과업계에서는 과자 시장이 소비자가 옛 맛을 다시 찾는 순환구조로 정착했다고 분석한다. 새로운 맛을 찾던 소비자들이 결국 어렸을 때부터 먹던 맛을 다시 찾기 때문에 오래된 제품에 오히려 경쟁력이 붙는다는 것. 다 큰 어른들이 주 소비자가 됐다.
지난해 각 제과업체의 매출액 자료에 따르면 농심의 '새우깡'(출시 1971년)은 700억원, 해태제과의 '홈런볼'(1981)은 450억원으로 둘 다 자사 1위 매출 실적을 기록했다. 이외에도 가장 오래된 '연양갱'(1945)부터 '죠리퐁'(1972)''맛동산'(1975)''빼빼로'(1983) 등 30년 이상 된 장수 브랜드 과자들이 매년 수십억에서 수백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며 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또 '에이스'(1974) 등 옛날 비스킷이나 크래커 종류 과자가 꾸준한 인기를 얻는 것에 대해서는 20, 30대 여성층이 무시할 수 없는 과자 소비층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장수 브랜드 과자에 대한 업계의 마케팅 전략은 이렇다. 포장 디자인에 큰 변화를 주지 않고, CF 로고송도 그대로 쓰는 등 친숙한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꾸준히 노출시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제품명은 점점 고유명사가 되면서 탄탄한 브랜드 가치를 쌓는다.
그러면서 기존 제품을 활용해 개발한 신제품도 함께 인기를 얻고 있다. 새우깡은 오리지널 제품 외에도 매운새우깡'쌀새우깡'오징어먹물새우깡'코코아새우깡 등 다양한 시리즈가 나왔다. 홈런볼도 과자 속에 초콜릿을 넣은 버전 말고도 치즈'생크림'딸기'바나나'캐러멜 버전이 나왔다. 빼빼로는 제과업계에 다양한 막대형 과자 제품을 낳은 '대모'(大母) 격이다.
◆이름값 하는 과자들
과자 이름에 담긴 재미난 유래가 적잖다. 새우깡은 '깡'스타일의 원조다. 1971년 롯데공업은 새우깡을 출시했다. 롯데공업은 현재 농심의 전신이다. 새우깡이라는 이름은 당시 롯데공업 신춘호 회장이 지은 것이다. 딸이 '아리랑'을 "아리깡 아리깡 아라리요"라며 앙증맞은 발음으로 부른 데서 착안해 '깡'을 과자의 주재료인 '새우' 뒤에 붙인 것.
새우깡이 히트를 치자 경쟁업체들은 감자깡'고구마깡'오징어깡'양파깡 등의 제품을 내놨다. 그러면서 시장에 다양한 재료와 맛의 과자 제품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비슷한 유행으로 '오'스타일도 있었다. 1999년 동양제과가 출시한 '오! 감자'가 히트 친 이후 오키'오뉴'오뜨 등 히트 제품이 잇따랐고, 기존 '오예스'를 원조로 치면서 "과자 이름에 '오!'처럼 기억하기 쉬운 짧은 감탄사를 쓰면 뜬다"는 재미난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개명을 하고 탄탄대로의 운명을 얻은 과자도 있다. 1975년 출시된 '맛동산'의 원래 이름은 '맛보다'였다. 그런데 판매 실적이 저조하자 해태제과는 맛보다를 6개월 만에 시장에서 철수시킨다. 이후 해태제과는 과자 이름과 관련한 소비자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온갖 고소한 맛이 모여 있다'는 뜻을 지닌 맛동산으로 이름을 바꿔 재 출시, 히트를 쳤다.
마케팅 과정에서 이력이 남는 제과업계 과자 제품들과 달리 아무런 이름도 없이 시장 바닥에 먼저 나온 옛날과자들은 이름의 유래에 대한 '설'이 전해질 뿐이다.
부채과자'소라형 과자'고구마형 과자(고구마를 얇게 썰어 말린 모양) 등은 모양만 봐도 이름의 유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각종 유과(油菓'기름에 튀겨 만든 과자)나 강정(물엿에 버무려 만든 과자) 역시 재료명과 함께 만드는 방법이 이름에 나와 있으니 마찬가지.
그런데 옛날과자 중에 '오란다'라는 과자가 있다. 옛적에 한 네덜란드 과자가 일본에 전해졌다. 이때 네덜란드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Hollanda(호련다)에서 맨 앞의 H가 빠진 Olanda(오란다)가 과자 이름에 그대로 적용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겨 만드는 지금의 오란다는 원래의 네덜란드 과자와 다르단다.
'옥춘당'(玉春糖)도 있다. 추억의 과자인 것은 물론 혼례'회갑'제사 등 큰상 차림에 빼놓지 않고 가득 쌓아 올리던 화려한 빛깔의 과자다. 쌀가루로 만들며, 둥글 옥'둥글 춘이라는 한자처럼 둥글납작한 모양이다. 조금 어렵게 다가오는 옥춘당은 사실 쉬운 한글 이름이 있단다. '맷돌엿'이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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