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 참사 10주기] <상> 아물지 않는 유가족 고통

입력 2013-02-14 11:23:55

"희생자 안식처 추모공원 조성, 그렇게 어렵나요"

"우리 지은아, 너무 보고 싶구나." 국화꽃 열 송이를 손에 든 박민철(가명'63) 씨가 4일 중앙로역을 찾았다. 자신의 마음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벽. 그곳에 10년 전 새긴 딸의 이름이 있었다. '그날'의 사고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빨리 잊혀 가지만 먼저 떠난 자식을 향한 그리움은 해가 갈수록 더 깊어만 간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2003년 2월 18일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전동차 화재로 인한 대참사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192명이 숨지고 148명이 부상당한 대참사는 지금까지도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다. 이들이 겪는 아픔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 192명은 한 가족의 든든한 울타리였을 아빠, 엄마, 누군가의 소중한 딸과 아들이었다. 취재진은 사고로 20대 딸과 아들을 잃은 아버지 두 명을 인터뷰했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자녀의 나이가 20대에 그대로 멈춰져 있듯, 아버지의 가슴 속 상처도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었다.

◆먼저 떠난 딸, 슬픔은 부모의 몫

4일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박민철(가명'63) 씨는 10년 전 딸을 잃었던 장소를 다시 찾았다. 평소엔 일부러 피했던 곳이다. 국화꽃 열 송이도 손에 들었다.

역 안에 비상문을 열고 들어서자 새까맣게 탄 사물함과 거울, 공중전화기가 그날의 상처를 안고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그을음이 내려앉은 벽에서 딸의 이름을 찾아냈다. '우리 지은아, 너무 보고 싶구나.'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름이다.

박 씨는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2003년 2월 18일, 5분 차이로 두 딸의 운명은 달라졌다. 그날 아침 둘째딸 지은(당시 23세) 씨는 아르바이트하러, 셋째딸 미은(가명'당시 21세) 씨와 함께 반월당역에 가는 길이었다. 지은 씨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언니, 집에 뭘 두고 나왔어. 다음 지하철 타고 바로 갈게. 먼저 가." 동생이 집으로 간 새 1호선 해안역에서 지은 씨를 실은 1080호 전동차는 중앙로역에서 멈췄다.

5분 뒤 미은 씨가 탄 열차는 큰고개역에서 갑자기 정차했다. 그리고 박민철 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빠! 언니가 탄 지하철에 불이 났나 봐!" 지은 씨 생일을 6일 남겨둔 날이었다.

딸이 죽은 뒤 박 씨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장례식장이 마련된 대구시민회관에서 9월까지 지내며 그곳에서 사계절을 고스란히 느꼈다. 술에 기대어 잠들어도 새벽 서너 시면 어김없이 눈이 뜨였다. 스티로폼을 깔고 바닥에서 자면 자원봉사자들이 이불과 히터를 가져와 몸과 마음을 데워줬다.

그 해 6월 말 지은 씨가 마지막으로 꿈에 나타났다. 희생자 합동 장례식을 3일 앞둔 날이었다. "새벽 3시였어요. 지은이가 '아빠, 이제 나 좀 보내줘'라고 하더니 내 가슴에 안겼어요. 그리고 놀라 눈을 떴는데 그 이후로 다시는 지은이가 꿈에 안 나오네요."

연간 70억~80억원의 매출을 올리던 중소기업 사장이었던 박 씨는 일도 그만뒀다. 중소기업청에서 기술개발혁신상까지 받으며 열심히 꾸린 회사 살림. 하지만, 직원 30여 명을 남겨두고 빈손으로 나왔다. "딸이 죽었는데 먹고살려고 일한다"는 세상 사람들의 말도 두려웠고 일할 의욕도 없었다. 키 174㎝에 70㎏이었던 체중이 이제는 57㎏으로 줄었다. 군대에서 의장대까지 할 만큼 건장했다는 박 씨는 "마음이 아프니까 몸도 약해지더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삶이란 남은 자의 몫이었다. 그 해 9월 경남 마산에 태풍 '매미' 피해 현장에 자원봉사를 하러 떠났다. 그곳에서 누군가도 박 씨처럼 소중한 가족을 잃었을 터이다.

낯선 이의 죽음에 함께 아파한 시민들에게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농사를 짓는다. 아내와 함께 봄이 되면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구고, 열매 맺는 모습을 보며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상추나 고추 등 수확물은 동네 이웃이나 경로당에 나눠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완전한 치유가 되지는 못한다. "남은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강한 척하는 겁니다. 그래도 나이가 드니 눈가부터 촉촉해지네요."

박 씨는 두 달에 한 번씩 막걸리와 난을 들고 팔공산으로 간다. 딸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에게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희생자들을 위한 작은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이다.

"사고 뒤 온 국민께서 과분할 만큼 사랑과 관심을 보내주셨고, 함께 아파해 주셨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작은 동산을 만들어 가족을 잃은 이들이 모여 희로애락을 같이하고 그날의 아픔을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장소가 생긴다면 더는 바랄 게 있겠습니까."

◆앞서 간 외동아들, "항상 함께 있다고 느껴"

유정현(가명'64'울산시 북구) 씨는 외동아들을 잃었다. 해병대를 제대한 아들은 대학 복학을 앞두고 수질 관련 자격증을 따기 위해 울산과 대구를 오가던 중이었다.

사고 당일도 시외버스로 대구에 도착한 뒤 동대구역에서 중앙로역 근처에 있는 학원에 가다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유 씨는 "졸업 후 취직을 위해 자격증을 꼭 따야 한다며 집 앞을 나서던 아들의 모습이 눈앞에 훤하다"며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유 씨는 집에서 아들 얘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부인도 마찬가지다. 부부에게 먼저 간 아들은 가슴 속에 영원히 묻어 둘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는 "괜히 아들 얘기를 했다가 마누라에게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것 같아 아예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아들은 항상 그와 함께 있다.

그는 밥을 먹을 때도 속으로 '아들아 너도 먹어라'고 말을 건네고, 이를 닦을 때도 '아들아 너도 함께 닦자'라고 속으로 말한다. 눈이나 비가 오면 '우리 아들, 많이 춥지?'라고 말한다. 항상 아들과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주름진 얼굴 위로 어느새 눈물이 흘렀다.

유 씨는 사위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딸이 부모가 외로울까 봐 결혼한 뒤에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아들의 빈자리를 사위가 채워주는 셈이다. 그는 "딸과 사위가 있어 그래도 의지를 한다"며 "유가족 중에 스트레스로 세상을 떠난 사람도 많고, 가정이 파탄 난 경우도 많다. 참사 이후 완전히 엉망이 된 유가족도 적지 않다"고 했다.

참사 10주년이 됐지만, 대구시가 약속했던 추모공원도 추모사업도 제대로 안 되는 현실에 분개했다. 유 씨는 "팔공산 시민안전테마파크 건립 후 유가족들과 논의해서 추모공원을 만든다고 했지만, 아직 공청회 한 번 연 적 없고, 시민안전테마파크에 유가족 사무실을 두고 추모행사도 개최한다고 했지만 모두 거짓말"이라며 "대구시와 유족대표들 모두 책임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들의 유골이 시민안전테마파크에 매장돼 있다. 그는 "유골을 주면 집에 가져가든지, 봉분을 만들든지 내가 알아서 하고 싶다"며 "요즘은 잠도 안 오고 분통만 터진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이창환기자 lc156@msnet.co.kr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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