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설을 쇠었다. 명절 선물로 들어온 굴비를 꺼내 본다. 바닷가에 사는 친척한테서 온 것이다. 굴비를 보면 신유사옥 당시 흑산도로 유배갔던 손암 정약전 선생이 생각난다. 선생이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다 보니 죽은 물고기가 도처에 쌓여 있었다. 보관할 방법을 몰라 썩히고 있는 것이었다. 굶어 죽는 사람이 널려 있던 시절이었다. 백성의 무지를 딱하게 여긴 선생이 나무를 엮어 건조하게 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또한, 말린 생선을 대궐에 팔 수 있게 주선하여 흑산도는 금세 부자가 되었다. 수라간에서는 겨울철 대비로 말린 생선을 한꺼번에 구입했던 것이다. '힘보다 지혜를 쓰라'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것은 배열의 지혜가 아닐까.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분자가 같은 탄소이면서 배열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 이는 곧 분자가 같은 탄소라도 배열에 따라 석탄이 되기도 하고,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같은 조기라도 버려두면 썩은 물고기가 되는 것이요, 잘 말려서 상품으로 가꾸면 값비싼 굴비가 되는 이치이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손암 선생이 만든 한국 최초의 수산학 연구서가 허름한 주막의 벽지로 사용된 일이다. 선생은 15년 유배생활 동안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조사하고 채집하여 총 3권의 '자산어보'를 만들었다. 수산 동'식물 155종에 대한 각 종류의 명칭, 분포, 형태, 습성 및 이용에 관한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자산(玆山)은 지금의 흑산(黑山)이다. 선생이 숨을 거두었을 당시 백성의 무지는 또 한 번 혀를 차게 했다. 사망소식을 들은 자식들이 황급히 도착한 곳은 흑산도의 허름한 주막이었다. 이름없는 촌부가 선생의 마지막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자식들이 통곡하다가 문득 사방을 둘러보니 벽지에 아버지의 글씨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종이가 귀한 때라 글을 모르는 촌부가 선생이 써놓은'자산어보'를 찢어 벽에 발랐던 것이다. 늦게나마 자식들이 이를 잘 수습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어류연구서로 보관한 사실 또한 후손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이 또한 배열의 힘이 아니겠는가.
굴비 몇 마리를 놓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밖이 어두워져 온다, 저녁때가 된 모양이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집 안에도 냉기가 스며든다. 엄동설한에 굴비라니. 예전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세월이 좋아 오늘날 나 같은 서민까지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음은 절해고도의 유배지에서도 민초들의 삶을 염려한 조상 덕분이리라. 신문지에 꽁꽁 싸서 신줏단지처럼 보관했다가 겨울 반찬으로 한 마리씩 구워 먹으면 좋을 것이다. 손암 선생이 보시면 빙그레 웃으시려나.
小珍/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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