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불빛에서 한참을 멀어지자 사거리다방의 간판이 보입니다. 그 옆의 느티나무식당과 담배 가게. 다시 칠흑 같은 암흑을 뚫고 한참을 달리다보면 어둠의 사위를 가르고 한 남자가 어슴푸레 나타납니다. 한 손엔 손전등을 들고 또 다른 손엔 커다란 개를 끌고 말이지요.
허삼관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를 전후해 중국에서, 자신의 피를 파는 것은 조상을 파는 일이라 여겨 아무도 선뜻 그 일을 하려하지 않았을 때 피를 팔아 집안의 큰 일을 해결한 사람이었습니다. 허삼관은 평생 열 번에 걸쳐 피를 팝니다.
처음 피를 판 돈으로는 자신의 결혼자금을 마련했지요. 두 번째는 자신의 큰아들을 위해 피를 팔았습니다. 큰아들이 이웃집 아이를 때려 크게 다치게 하는 바람에 병원비를 물어주어야 했거든요. 세 번째는 자신의 일탈을 위해서 피를 팔지만 아내에게 들키는 바람에 피를 팔아 번 돈은 아내와 아이들의 옷을 사는 데 쓰이고 맙니다. 네 번째는 식량난으로 인해 온 가족이 멀건 옥수수가루 죽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지내고 있을 때 식구들에게 맛있는 밥한 끼 사 먹이고 싶은 마음에서 피를 팝니다. 다섯 번째는 외지의 일터로 떠난 큰 아들이 쇠약한 몸으로 돌아오자 그에게 쥐여 줄 돈을 마련하고자 피를 팝니다.
여섯 번째는 둘째 아들의 상사가 집에 오자 그에게 자신의 아들을 잘 부탁할 돈을 마련하고자 피를 팝니다. 큰아들 때문에 피를 판 지 한 달이 채 안되어서였는데도 말이지요. 더구나 피를 팔고 난 후 기력이 다한 상태에서 접대를 위한 술까지 벌컥벌컥 마셔야했습니다. 일곱 번째는 쇠약한 몸을 한 채 일터로 떠난 아들이 중병에 걸려 다시 돌아오자 상하이의 큰 병원에 입원시킬 돈을 마련하기위해 피를 팝니다. 배를 타고 병원까지 가는 도중에 며칠에 한 번씩 여러 차례 피를 뽑으면서 말이지요. 그의 몸은 점점 쇠잔해지고 생명을 잃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열 번째 피를 뽑던 중 정신을 잃고 쓰러집니다.
10년 후, 60세가 된 허삼관은 불현듯 생애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피를 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를 판 후에 항상 들르곤 하던 식당에서 돼지간볶음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오던 참이었거든요. 하지만 병원에서는 당최 그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이제 그의 피는 건강한 젊은 피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지요. 아직은 스스로를 정정하고 또 쓸모 있다고 생각해온 허삼관은 상처받고 억울한 마음에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합니다. 영문을 모르는 장성한 자식들은 동네가 창피하다고 서러워하는 아버지를 나무랍니다.
'허삼관 매혈기'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중국을 배경으로 했지만 한 남자가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는 점에서, 또한 나이든 어느 날 상실감과 외로움을 느낀다는 점에서 정서적으로 공감되는 바가 컸습니다.
남자는 전원에 집을 지어 건강한 삶을 살고자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족 구성원들의 찬성은 없었지만 기다림 끝에 그는 그 꿈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버려진 땅에 길을 만들고 골조를 세우고 그곳에 전기와 온수가 들어오게 하기까지, 제대로 집을 지어야겠다는 책임감이 있었겠지요. 자신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오만가지 역경을 한꺼번에 맞닥뜨리는 과정과도 맞먹는 듯 했습니다.
비록 직접 집을 지은 건 아니었어도 말이지요. 집은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완성되었지만 그의 체중은 부쩍 줄어있고 움푹 파인 주름살에 그을린 얼굴은 갑자기 그를 5년은 더 늙어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가족 중에 어느 누가 그의 노고를 알아주었을까요. 그의 아내조차 당장은 도시의 불빛에서 멀어지게 만든 데 대해 원망을 늘어놓았으니까요.
그렇다고 아내의 지청구를 잠자코 듣고만 있을 남자는 아니었지만요. 가로등도 뜨막한 캄캄한 길을 따라 새로 지은 전원주택을 찾아가는 걸 두려워하는 아내를 위해 밤이면 손전등을 비추고 마중을 나오는 남자. 아침이면 하얗게 서리 내린 아내의 자동차를 출발하기 전에 미리 덥혀 놓아주는 남자. 그래서 미워할 수 없는 그 남자가 집짓기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달래고자 소주 한 병에 돼지간볶음 한 접시를 마주하고 잠시 앉아 있다가 어느새 거실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허삼관이 스쳐갑니다. 그 또한 '평생 가족을 위해서 피 같은 무얼 팔지 않았나'라는 생각에서 말이지요.
백옥경<구미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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