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사랑 대구자랑] <6> 국채보상운동

입력 2013-02-07 07:51:25

나라의 위기 때마다 똘똘 뭉친 우국충정의 본향

세계사에 빛나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불꽃을 피운 것은 대구의 큰 자랑거리이다.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있는 기념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세계사에 빛나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불꽃을 피운 것은 대구의 큰 자랑거리이다.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있는 기념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서상돈
서상돈

"무릇 신민이 충(忠)으로 행하고 의(義)를 숭상하면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평안을 누리며, 불충하고 불의하면 나라는 망하고 백성의 멸함은 고금의 역사에 근거함이라.… 우리의 국채 1,300만원은 대한의 존망(存亡)이 달린 일이라 할지니…. 이천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원이 될 것이니…국민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서 잠시만 결심하면 갚을 수 있는 일이라…"(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문 중 일부)

◆대구정신 푯대

삼국 통일 이후 이 나라를 이끌어온 대구경북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 유달리 강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우국충정(憂國衷情'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참된 마음)의 본향이 대구경북인 것이다.

충(忠)과 의(義)를 추구하는 대구정신이 발현된 대표적인 것이 국채보상운동이다. 1907년 대구에서 불꽃이 점화돼 전국으로 확산한 국채보상운동은 대구를 넘어 대한민국의 정신적 자산(資産)이다. 나랏빚을 직접 채무자도 아닌 일반 국민이 대신 갚겠다고 일어난 외채 갚기 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은 IMF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운동에서 보듯 대한민국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원동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국민이 호주머니를 털어서 나랏빚을 갚아 국가를 지키겠다는 데에 있다. 건강에 나쁜 담배를 끊고 절주(節酒)하며 여자들이 반지를 뽑아 국가를 보존하려는 평화운동인 것이다.

◆모두 하나가 되다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는 특별회에서 광문사 부사장인 서상돈(徐相敦)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사장 김광제(金光濟) 등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해 발표하면서 일본에 진 빚 1천300만원(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천300억원가량)을 갚기 위한 대장정이 시작됐다.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곧바로 전국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각계각층,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운동에 참여해 2월 운동 시작 후 4월 말까지 참여자가 4만여 명이나 됐다. 특히 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대구에서는 남일패물폐지부인회(南一佩物廢止婦人會), 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奪還會)가 결성돼 패물을 보상운동에 기부했다. 하류층에 속했던 기생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가운데 기생 앵무는 민족정신이 남달랐다. 국채보상운동에 네 번째로 기금을 내 화제가 됐던 것. 그녀는 의연금 가운데 최고액이 100원이란 기사를 보고 자신도 100원을 들고 수취소에 나타나 의연(義捐'사회적 공익이나 자선을 위하여 돈이나 물품을 냄)했다. 이것이 '대한매일신보'에 대서특필됐고 동료 기생들도 뒤따라 의연금을 냈다. 일본에 유학 중인 800여 명도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했다. 양반, 농민, 상인은 물론 거지, 도둑까지 기부에 참여하는 등 나라를 구하기 위한 행렬이 장사진을 이뤘다.

◆세계사에 빛나는 운동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자 일제는 탄압하고 금지했다. 송병준(宋秉畯)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 공격에다 통감부에서 국채보상기성회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온갖 방해를 해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대구인과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실하게 보여준 역사에 길이 빛날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운동은 흘러간 역사가 아닌 현재와 미래에도 유효한 '살아 있는 역사'라는 점에서 더욱 각광받고 있다. 1997년 IMF 환란 시기에 금모으기운동으로 재현돼 세계인을 놀라게 한 것. 또한, 주빌리의 외채 탕감운동이나 아탁(ATTAC)의 투기자본규제운동 등과 연계하면서 세계적인 운동으로 성장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가꾸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이다. 기념사업회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건립 추진과 아울러 '대구 라운드'를 열어 국채보상운동의 세계화에 앞장섰다. 또 국민 기부의 날 제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을 추진하며 이 운동을 국내외에 선양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국민들의 결집된 힘에 의한 국권회복운동이다. 이를 통해 높아진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이 구국운동, 의병항쟁 등 독립운동의 밑바탕이 됐다. 이 운동이 불꽃을 피운 곳이 대구라는 사실은 대구의 자랑이자 긍지이며 큰 유산이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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