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투시형 담장', 즉 펜스가 새롭게 설치되고 있다. 어린이 안전 문제가 크게 불거지고 때맞춰 국토해양부의 '건축물의 범죄 예방 설계 가이드라인'도 나왔기에 시의적절하다. 그러나 이 가이드라인에는 투시형 담장에 대한 구체적인 디자인 언급은 없다. 그런 탓인지 모르나, 일부 펜스는 왜 저렇게 설치하고 있는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마디로 '오버 디자인'이다. 형태가 조잡하고 색채도 생뚱맞다. 모양새가 너무 현란하다.
본래 펜스는 가로 시설물 중에서 공간을 분할하거나 사람의 동선을 유도하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의 하나다. 비교적 간단한 시설물이지만 규격화된 제품은 제법 다양한 편이다. 다만 도시 풍경에서 펜스는 굳이 눈에 띌 필요가 없는 배경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디자인이 과도하다 보니, 부수적인 펜스가 오히려 중요한 본체가 되어버렸다. 주객이 뒤바뀐 꼴이다. 즉 학교 건물이나 가로수보다 더 우리의 시선을 끄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사람과 자연조차도 초라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장치가 됐다. 만일 앞으로 모든 초등학교와 나아가서 중등학교에 저러한 종류의 펜스가 설치된다고 보면, 이러한 디자인이 지닌 문제점을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넓게 보면, 과도한 디자인은 결코 초등학교 펜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근래 우리 주변에는 화려하게 치장하거나 겉치레로 과장된 디자인이 자꾸 나타나고 있다. 과대 포장된 관광 안내판, 시선을 너무 끄는 도로 포장, 주변을 외면한 거리 벽화, 상품보다 현란한 상점 간판, 실내보다 외관만 번듯한 건물…. 즉 종류에 관계없이 이러한 비정상적인 디자인은 본래의 기능은 뒷전이고 장소와도 무관해서 결과적으로 주변 환경을 압도한다. 너무 표피적이며, 과연 디자인이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왜 이러한 '너무 가벼운 디자인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수많은 디자인 전문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며 대단한 성과를 내고는 있지만, 정작 펜스처럼 작은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힘들여 디자인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거나, 수입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 도시에는 버려지고 외면당하는 디자인거리가 산적해 있다. 물론 그 원인은 디자이너만의 한계가 아니며, 발주자의 매너리즘과도 관계되고 의사 결정권자의 선호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하여 시민 의식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결국 우리 사회에 팽배하는 자기중심주의의 한 결과이자, 물질 만능의 과시적인 욕망 탓인지 모른다.
우리 도시와 동네는 가만히 두어도 자꾸 복잡하게 바뀌기 마련이다. 자칫 집적의 이익보다 앞뒤가 상충되고 흑백이 부닥쳐서 불편과 부조화가 커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큰 방향을 정하고 틀을 만들어서 변화를 유도하는 총괄적인 디자인 관리가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과도하게 눈에 띄는 디자인은 어울림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조화의 아름다움을 파괴한다. 게다가 비용이 더 많이 들며 너무 소모적이 된다. 작은 디자인이 모여서 전체 디자인을 이루게 되니 펜스 하나라도 신중히 디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디자인은 감성적인 것이고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므로 정답이 없다고 하지만, 공공장소에서는 최상은 아니더라도 최적의 디자인은 있기 마련이다. 즉 우리 도시에서 각 부분은 가능한 한 간결할수록 좋고 제각각 고유한 위상을 지킬 수 있을수록 좋다. 공공시설물 디자인의 중요한 역할은 각 부분 자체에 적합한 디자인을 창작하는 일이며 또 그러한 부분 사이의 관계를 잘 맺어주는 일이다. 이제 그러한 디자인을 선택할 수 있는 시민의 성숙한 감각이 우리의 디자인 문화를 되살리고 보다 성숙해 가게 할 것이다.
초등학교 펜스 디자인은 범법자가 함부로 다가갈 수 없도록 안전 기능은 확실하게 하되, 명료하고 경제적이며 간결한 모양새로서 보통사람 눈에 덜 띄면 충분하다. 더하여 이런 작은 펜스에서 겸손을 배울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그러한 명품 펜스 디자인이 나올 때까지는 부득이 최소한도로 디자인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괜히 낭비하고 주변을 망칠 바에야 차라리 '노 디자인'이 낫다.
김영대/영남대 교수·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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