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우리 시대의 '레미제라블'

입력 2013-01-23 10:50:08

기자라는 직업 때문인지 매일 신문과 인터넷에 어떤 뉴스들이 올라와 있는지 살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버릇이 됐다. 참,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사건사고도 많고, 가슴 아픈 사연도 많다. 하지만 며칠 전 접한 기사만큼 가슴과 머리를 멍하게 만든 이야기는 그리 흔치 않았다. 원자력공학자를 꿈꾸던 소년이 하루아침에 전과자가 되고, 집창촌을 떠도는 알코올중독자로 전전하다 꽃다운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야기다.

국내에서 뮤지컬 영화로는 사상 최대의 흥행 실적을 거둔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과 이 이야기의 주인공 소년은 많이 닮았다. 굶주린 어린 조카들을 먹이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장발장이나, 철없는 소년의 단순한 장난(?)으로 치부해 줄 수도 있는 작은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가 되어 버린 이 소년의 공통점은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이라는 것이다.

이 소년의 이야기는 이렇다. 전교 1등, 학력평가 성적 전국 5위권이며, 원자력공학자를 꿈꿨던 소년은 대입학력고사를 3개월여 앞두고 공부를 하다가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운전석 창문이 열린 채 열쇠가 꽂혀 있는 승용차 한 대를 우연히 발견했다. 호기심이 일었다. 아버지가 운전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열쇠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시동이 걸렸고 차량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소년은 뒤차의 경적 소리에 놀라 중앙선을 가로질렀고 행인 2명을 치었다. 덜컥 겁이 난 소년은 차량을 두고 달아나다, 순찰 중이던 경찰관에게 잡혔다.

보도 내용만으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피해자 2명이 합의금으로 각각 2천만 원과 3천만 원을 요구했다는 것으로 보아 치명적 사고는 면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이 소년의 집이 5천만 원의 합의금을 감당할 형편만 됐어도 '잊지 못할 인생의 에피소드'로 끝났을지 모른다. 먼 훗날 세계적 원자력공학자가 된 소년이 과거를 회상하며, 어린 시절 잊지 못할 추억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년에게는 절도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이 씌워졌고, 피해자와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찰은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구속 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하라고 했다. 소설과 영화, 뮤지컬 속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에게는 미리엘 신부가 있었지만, 우리 현실의 '레미제라블'에게는 '법과 정의'를 외치는 자베르뿐이었다. 소년을 불쌍히 여긴 담당 형사가 탄원서와 서명을 받으러 쫓아다녔지만 구속을 막지는 못했다. 하루아침에 지옥의 구덩이로 떨어진 소년에게 미리엘 신부는 그 후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동생은 문제아가 되어 경찰서를 드나들었고, 소년은 생을 달리했다. 한순간의 실수가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면 '가난'이 한 소년의 꿈과 가정을 산산이 부수고 말았다.

뜬금없이 국회에서 열리고 있는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청문회가 오버랩된다. 위장 전입, 기업체 협찬 강요, 공금으로 잦은 부부 동반 해외 출장, 불법 정치자금 후원, 미심쩍은 예금 증가, 증여세 탈루 의혹 등 진위를 떠나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의 수장 자격에 대한 논란치고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 융통성은 없지만, 남과 자신 모두에게 똑같이 엄격했던 자베르 경감이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질 정도다. 새누리당 일부에서는 "임명 동의안이 부결될 경우 박근혜 당선인과 당 모두 정치적 타격을 입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국민이 행복한 100% 대한민국'을 주창하고 있다.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법과 정의'만을 외치는 자베르가 아니라,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미리엘 신부가 필요하다. 하물며 '자신과 가진 자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사이비 자베르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수호한다면, 그것은 99% 국민을 '레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당선인 및 당의 정치적 입지와 99% 보통 국민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한지 새누리당은 심사숙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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