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골목투어 성공은 지역 문화유적 '신성장 자원화' 충분하단
여행은 삶을 풍성하게 살찌워 준다. 특히 여행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대구답사마당 이승호(57) 대표는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10여 년을 '역사기행'이라는 한 길만을 걸어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속살을 더듬으며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법'을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다. 전문가 아닌 일반인들도 그와 함께하면 명승이나 유적지를 '구경'하러 다니는 일도 '답사'(踏査)가 된다.
이달 16일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부인사 답사에 나선 대구답사마당 일행을 따라 나섰다. 대구 학정초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함께 했다. 부인사 초입부터 눈이 적당이 쌓여 인터뷰 택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쌀쌀한 산속 날씨였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봄날이었다.
◆여행과 역사 공부 '일석이조'
"부인사는 선덕여왕을 추모하기 위한 세운 사찰입니다. 고려시대 초조대장경을 보관했던 사찰이었던 만큼 규모가 어머어마 했어요. 당시 스님 2천여 명이 계시던 절입니다." 이 대표의 설명이 시작되자 부인사 앞마당에서 뛰어놀던 개구쟁이 어린 학생들도 귀를 쫑끗 세운다.
"승시라고 들어봤나요." 이 대표의 질문에 한 학생이 "서문시장요"하고 되받는다. 순간 앞마당이 웃음바다가 된다. "팔공산에는 동화사'송림사'은혜사 등 많은 사찰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은 출타하기가 쉽지 않다보니 아예 이곳에서 스님들을 위한 장터가 생겼지요. 그게 바로 부인사 앞에서 매달 열린 승시입니다." 그제서야 꼬맹이들이 고개를 끄덕 거린다.
일행은 부인사 이곳저곳을 돌며 답사에 나섰다. 이 대표가 유적들의 의미와 비밀들이 담긴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 때마다 일행들의 입에서는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 학부모는 "겨울방학 동안 집안에만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계획했는데 무조건 놀고 먹고 마시는 여행보다 역사라는 테마로 배움이 있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며 좋아했다. 또 다른 학부모는 "답사는 고리타분하고 지겹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막상 자녀와 함께 와보니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했다. 참가 학생들도 대만족이었다. 조성모(학정초교 3년) 군은 "엄마랑 함께 여행을 오고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했다.
◆여행의 인식을 바꾸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은 '술 먹고 흔들고(춤추며) 남의 짝 찾는 것(남녀의 만남)'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 인식을 바꾸고 싶었어요." 이 대표가 먹고 노는 여행을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여행으로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답사마당'이라는 이름의 문화재 답사 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올해로 14년째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놀고 먹는' 여행의 이미지를 바꾸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01년 문화유적지답사 전문업체인 '대구답사마당'을 설립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대구경북의 유적지에 의미를 부여했고 직접 문화유산 해설사로 현장에서 답사라는 개념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지금은 매년 2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대표의 인솔로 전국의 문화유적을 답사하고 있다. 현재 답사마당 회원 수도 1만여 명을 훌쩍 넘어섰다.
또 남부도서관의 대구인근문화 유적답사 팀을 수년째 운영하고 있으며 여성회관, 대구공업대학, 계성초등학교 등에서 다양한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교과서와 함께 하는 역사체험학습단'을 만들어 인기를 끌고 있다.
더구나 자신만을 위한 여행이 아니다. 이웃과 함께 하는 여행이다. 시각장애우들을 위한 문화유적 답사 행사를 10여 년째 벌이고 있다. 마음놓고 나들이 한 번 하기 어려운 시각장애인들에게 귀로 듣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문화 체험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
"여행 문화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즐기고 소비하는 게 전부인 여행객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실없이 운영되는 답사 프로그램이 넘쳐나는 만큼 인솔 단체와 강사의 수준을 꼼꼼이 따져봐야 하며 출발 전에 기본적인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해서 가는 수고도 아껴서는 안됩니다."
◆답사여행에 빠지다
대학 4학년 때였다. 이 대표는 친구들과 함께 경주 불국사에 놀러 갔다. 천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불국사에 금세 눈이 박혔다. 아름다웠다. "가슴이 '탁' 막히는 거예요. 가까이서 불국사를 바라보며 빼어난 건축양식에 빠져들었습니다. 당시의 느낌은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이때부터 우리 문화유산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아요."
대구로 돌아온 그는 이후부터 일부러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공부를 시작했다. "대구시와 경북도의 문화관광 관련 부서에 문턱이 닿도록 다녔죠. 서울도 많이 갔었어요. 경북궁'창덕궁 같은 궁궐들이 많다 보니 궁궐과 관련된 정보와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었거든요."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식으로 차곡차곡 쌓였지만 단순히 취미생활에 불과했다.
졸업과 동시에 지역의 한 여고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답사여행'을 만나기 위한 긴 여정의 시작일뿐이었다. 1년이 채 되지 않아 교단을 떠났다. 시내버스회사에 취직했다. 따분함의 연속이었다. 대학 전공(정치학)을 살려 정치계에도 발을 담궜다.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의 사무장으로 활약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가슴속에는 채워지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역마살'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새천년이 시자되고나서야 그의 운명을 정할 책을 만나게 됐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였다.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이 눈 밝은 미술사학자가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대해 들려주는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법'은 모든 '답사'의 모델이 되었지요. 이를 대중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행과 답사'의 만남을 시도해보자는 생각에 여행사를 차리고 본격적인 답사여행 전파에 나섰다.
◆틈만나면 공부하기
이 대표는 매주 3, 4회 정도 전국의 문화유적지를 돌며 직접 해설을 한다. 많을 때는 하루 수십 팀에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10년 넘게 이어온 일이지만 인상 한 번 찡그리지도 목소리 한 번 높이지도 않았다.
편하고 즐겁지 못한 여행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그의 여행 철학이다. "관광객이 해설사의 행동과 언행에 거부감이 들면 아무리 재미있고 유익한 여행도 아니한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얼굴에 웃음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일상의 짓눌림을 풀기 위해 관광하잖아요.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 보는 것이 관광이잖아요. 근데 해설사가 인상을 쓰고 발음이 좋지 않아 신경이 쓰이면 어떻겠어요. 그 고장에 대한 이미지는 실추되겠죠. 그래서 해설이 중요한 거예요."
이 대표는 요즘도 틈만 나면 지역 곳곳을 여행한다. 역사를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전국 유적지를 샅샅이 누비고 있다. 여행객들의 질문 수준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어서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최근에도 몽골에 항복하기를 거부한 삼별초가 강화도를 떠나 유랑의 길로 나섰던 전남 진도와 제주, 그리고 마지막 항쟁을 펼쳤던 경북 청도. 고려팔만대장경의 목재 원료를 공급했던 경남 남해 등지를 여러 차례 다녀왔다. 이날 들렀던 부인사는 100번 정도 다녔다. 발로 뛰며 공부한 덕에 그의 역사상식은 삼국시대는 물론 단군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풍부하다. "잘못 알려진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흔히 부르는 팔만대장경은 고려초조대장경으로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이 대표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정리한 책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대구경북 문화'역사 알리기
"스쳐가는 관광이 아닌 머무르다 가는 관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이를 알려야 합니다. 우리 고장이 가지고 있는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이 대표는 대구경북 문화유산 알리기에도 열심이다. 지역에는 풍부한 문화유산이 있고 이를 자원화할 경우 새로운 성장엔진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대구 중구의 골목투어가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대구경북은 문화유적 부분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패션'과학도시 등도 중요하지만 굴뚝 없는 산업인 관광에 대한 투자와 인프라 확충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입니다."
특히 팔공산 국립공원 지정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최근 광주 무등산이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소식을 듣고는 며칠 밤을 지새기도 했단다. "팔공산은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가치는 물론이거니와 '약사여래 신앙의 1번지'이기도 하고 왕건 등 고려시대의 역사적 유적이 산재해 있습니다. 국립공원 추진을 서둘러야 합니다."
인터뷰 말미.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곳을 물었다. 그는 주저없이 '창덕궁'을 꼽았다. "궁궐 답사는 문화유적 답사의 백미입니다. 기둥만 보더라도 답사의 개념을 알 수 있지요. 예를 들어 둥근 기둥은 당시 임금이 공적 업무를 보던 곳이었고 사각 기둥은 사적인 용도로 사용되던 곳이지요." 지역에서는 안동에 있는 목조건축이나 고택. 지리산과 섬진강 자락에 있는 오래된 사찰들도 그의 '버킷 리스트'에 올라 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이승호는=안동에서 태어나 안동초교와 청송중'고교를 졸업했다. 영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교사, 시내버스회사 총무, 정치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2001년 문화유적지 답사 전문업체인 대구답사마당을 차렸다. 대구시여성회관'남부도서관 대구경북 문화유적 답사 인솔강사를 하고 있으며 공부하는 여행문화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 대구문화재단 교육문화예술지원센터 실무위원, 대구공업대 외래교수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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