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앞 '여성' 수식어 성차별 꼬리표에서 차별화된 자산으로"
"21세기 사회변동의 핵심은 여성이다."(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2020년 이후 여성이 모든 분야에서 남성을 능가할 것이다."(영국 왕립연구소 소장 수전 그린필드)
말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법조인이나 의사 등 대표적인 고소득 전문직은 물론 공직'재계'정계 등에서 여풍이 거세다. 육'해'공군사관학교 모두 여생도가 상대적으로 다수인 남생도들을 제치고 수석을 휩쓰는 것은 이제 심심찮은 일이 됐다. 사회 활동에 대한 여성들의 열정과 욕망이 곧 미래의 경쟁력으로 치환되는 시대다.
◆그 많던 남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인식됐지만 최근 여성의 비중이 높아지는 분야가 적잖다. 대표적인 곳이 법조계다. 여성 판'검사가 늘고 있는 것.
신임 판'검사 현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난해 새로 임용된 검사 129명 중 여성 검사는 50명(38.7%)에 달했다. 신임 판사는 오히려 여성이 더 많다. 지난해 새로 임용된 판사 86명 중 55명(63.9%)이 여성 판사였다.
이러한 추세는 더욱 물살을 탈 전망이다. 전체 로스쿨 합격생 가운데 여성 비중이 2009년 39.7%에서 지난해 43.5%로 증가했다. 1984년 10월 한 신문기사에서 "제26회 사법시험 합격자 303명 중 여성이 5명이나 차지했다"며 "이로써 국내 현직 여성 법조인은 모두 24명으로 늘어났으니 여성법우회를 만들 때가 됐다"고 호들갑(?)을 떤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다.
실은 '여풍'을 넘어 '여초' 현상을 보이는 분야가 적잖다. 전국 초등학교 교사의 경우 1965년 여성 교사 비중이 25.5%였던 것이 지금은 80%대에 육박하고 있다. 새로 임용되는 여성 초등교사가 2000년대 전후로 전체의 90%를 차지하기 시작했기 때문. 당시 교육당국이 분석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남학생들의 성적이 상대적으로 너무 낮았다는 것.
◆'여성' 수식, 차별에서 경쟁력으로
최근 대한민국 역사상 '여성' 수식이 극적으로 붙는 장면이 나타났다. 지난 대선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선출된 것. 어찌 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다. 곧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부하 직원이 될 일반직 공무원 11만2천970명(2011년 기준) 중 여성이 30.1%(3만4천15명)다. 박 당선인의 또 다른 활동 무대인 정계를 봐도 여성 정치인 전성시대다. 제19대 국회 300명 의원들 중 여성은 모두 47명(15.7%)이다. 1948년 1명의 첫 여성 의원이 나왔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다. 국제의원연맹(IPU) 소속 155개국 의회 내 여성 의원 비율 평균이 19.1%인 것을 감안하면 여성의 정치 참여 비중이 더욱 늘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각계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직업명 앞에 여성이라는 수식을 따로 붙이면 '성차별'로 여기는 인식도 분명 있다. 직군 내에서 절대 소수인 여성에 대한 '꼬리표 붙이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떼어냈던 수식을 다시 붙이는 경우도 적잖다. 일단 수식으로 나타낸 다음 능력으로 승부하면 꼬리표가 아닌 경쟁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구 여성 변호사 급증
이달 14일 찾은 대구 수성구 범어동 법원 인근. 변호사 사무실이 가득 모여 있다. 삭막한 사무실 간판들 중 빨강'분홍'진보라 등 튀는 색깔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여성 변호사' 간판이다. 특히 '여성'과 '가사' '이혼' 등의 글자를 크게 키워 강조한 간판이 많았다.
대구는 최근 여성 변호사가 눈에 띄게 증가한 지역이다. 현재 대구변호사회에 등록된 여성 변호사는 모두 20명. 1998년 여성 변호사 사무실이 대구에 처음 문을 연 이후 매년 한두 명 정도 개업하던 것이 최근 2년간 10여 명 넘게 개업했다. 여성 비중이 많은 로스쿨 출신 여성 변호사들이 합세했기 때문이라는 분석.
대구지방변호사회 관계자는 "주로 이혼'위자료'양육권 등 관련 가사 사건에 여성 변호사의 출입이 늘고 있다"며 "차분한 말투와 꼼꼼한 업무 처리 능력, 그리고 여성 특유의 호소력을 기대하는 의뢰인들이 선임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밝혔다. 전국 여성 변호사 수는 2000년 96명에서 지난해 2천22명(전체의 15.9%)으로 10년 사이 20배 이상 증가했다.
◆여성이 여성 진료하는 시대
한 온라인 병원정보사이트에 접속해봤다. 사이트 측에서 따로 이름 붙인 테마별 진료과목 메뉴가 있었다. '여의사 피부과' '여의사 산부인과' '여의사 항문외과' 등이 눈에 띄었다. 클릭했더니 여성 의사들의 사진'프로필 및 소속 병'의원 목록이 가득 떴다.
여성 종사자들이 여성을 강조하는 상황은 의료계가 더하다. 진료 과목에 따라 여성 환자는 여성 의사만 찾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 그러면서 간판에 '여의사' 수식을 큼직하게 넣거나 아예 '여성의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곳이 많다. 산부인과'항문외과'성형외과 등이다. 산부인과의 경우 임신부들이 환자를 대하는 분위기상 여성 의사를 선호하고, 항문외과의 경우 신체 치부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여성은 여성 의사만 찾는 분위기가 강하단다.
여성 의사면허 취득자 수는 1950년 20명에서 지난해 3천59명으로 150배 이상 늘었다. 현재 국내 전체 의사 수의 3분의 1가량(2만4천여 명)을 여성 의사가 차지하게 됐다. 그러면서 남성 의사 위주였던 외과'비뇨기과 등에도 여성들이 적잖게 진출했고, 이제 어떤 질환이든 여성 환자는 여성 의사가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이 제법 갖춰졌다는 분석이다.
◆타고난 마케팅 전문가, 아줌마
사실 '아줌마'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여성들이 이전부터 있었다. 감히 남성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해 여성만의 경쟁력을 발산했다. 그러면서 어렵던 시절 가족을 부양하며 자식들을 키워냈다.
먼저 일명 '아모레 아줌마'로 불린 화장품 방문판매업 여성들이 있다. 1940년대 태평양(현재 '아모레퍼시픽')에서 고급 외제화장품에 대응하기 위해 아모레화장품을 출시, 국내 최초로 가정 방문판매를 시작했다. 아모레 아줌마들은 판매는 물론 홍보'판촉 활동까지 벌이는 '멀티 플레이'로 한국 화장품산업 역사를 이끌었다. 아직도 아모레퍼시픽 매출의 3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1960년대에는 '보험 아줌마'로 불린 보험설계사 여성들도 등장했다. 역시 현재 우리나라를 세계 7대 규모 보험강국으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야쿠르트 아줌마'도 빼놓을 수 없다. 노란 유니폼으로 잘 알려진 한국야쿠르트 소속 판매원 여성들은 1970년대에 등장, 우리나라 각 가정의 아침을 열었다. 처음 47명으로 출발한 것이 현재 1만2천여 명의 야쿠르트 아줌마가 활약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아줌마 마케터들의 성공 요인으로 소비자에 대한 강력한 '관계 형성' 능력을 꼽는다. 여성자기계발 동기부여 전문가 이성진 씨는 "여성 특유의 수평적 친화력'수다(소문 전파) 능력'네트워크 형성 능력이 마케팅에 잘 접목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고령화'핵가족 사회, '엄마' 능력 절실
최근 아줌마들은 더욱 다양한 일자리를 얻고 있다. 가정에서 발휘하던 '엄마' 능력이 요긴한 일자리가 많다. 정부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요양보호사'간병인 등 돌봄 서비스 일자리를 크게 늘렸다. 모두 중년 여성이 주 대상이고, 고령화 사회로 진입할수록 수요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오은진 연구위원은 "돌봄 서비스 일자리는 기존에 일을 하지 않았거나 경력이 단절된 40'50대 주부들이 일자리를 갖게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고 분석했다. 핵가족 시대가 되면서 점점 시댁이나 친정의 도움을 받기 힘들어진 젊은 부부들을 돕는 산후도우미나 보육 관련 일자리도 중년 여성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 산후도우미 3년차 주부 조모(52) 씨는 "직업 때문에 고향에서 멀리 나와 사는데다 바쁜 맞벌이 부부들이 산후도우미 서비스를 받는 것은 물론 엄마뻘 중년 여성들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부분도 있다"고 했다.
사실 이들은 최근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고, 청년실업이 만연해지자 남편과 자녀를 대신해 부업에 뛰어든 경우가 많다. 이달 15일 통계청의 고용동향 발표 자료에 따르면 50대 여성 취업자 수는 215만6천 명으로 2002년 121만 명이었던 것이 10년 만에 2배 가까이로 늘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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