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휴가 평균 7일 세계 꼴찌 수준…한국 직장인들의 '내몫 찾기' 딜
2013년 새 달력을 받은 3년차 직장인 김모(32) 씨.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빨간 날(휴일) 체크다. 올해는 주5일 근무 기준으로 토'일요일과 공휴일 모두 합쳐 116일이다. 지난해와 똑같다.
사실 '양'보다 중요한 것은 '질'이다. 평일 하루가 중간에 끼어 있어 징검다리 휴가가 가능한지가 핵심이다. 예를 들면 올해 현충일(6월 6일)'광복절(8월 15일)'개천절(10월 3일)은 목요일인데 금요일 하루만 연차 휴가(이하 '연차')를 쓰면 3박 4일 휴가가 가능하다. 삼일절(3월 1일)과 석가탄신일(5월 17일)은 금요일이라서 목요일이나 그다음 주 월요일 하루를 연차를 써서 붙일 수도 있다.
"야호!" 김 씨는 쾌재를 불렀다. 매달 하루 이틀꼴로 주어지는 연차를 쓰면, 일주일 받는 여름휴가 외에도 멀리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푹 쉬는 기회를 적잖게 얻을 수 있어서다.
◆한국 직장인 휴가 사용 세계 꼴찌 수준
김 씨의 '달콤한' 내지는 '엉뚱한' 상상은 여기까지. 그는 지난해 연차를 단 하루도 쓰지 못했다. 바쁜 업무에 상사들도 연차를 쓰지 않아 '눈치'가 보여 쓸 수 없었고, 대선 시즌까지 맞물리며 바쁘게 1년이 지나갔단다. 올해도 그럴 분위기란다.
지난해 8월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근로자 5인 이상 사업장은 1년간 80% 이상 출근한 근로자에게 15일의 연차를 줘야 한다. 연차는 근무기간 2년마다 1일씩 추가된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현장이 많은 상황.
2년여 동안 자기 회사 업무 스타일을 파악한 김 씨는 할 말이 많다. "업무 특성상 매주 5일의 근무일 중 하루는 좀 여유가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그날마다 부서당 한 명씩 돌아가며 쉬면 정상적인 연차 사용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냥 눈치껏 모두 나와서 자리만 지키는 날이 많아요."
연차는 구경도 못 해본 김 씨의 사례만큼 잔인(?)하지는 않지만 주어진 휴가를 채 다 못 쓰는 직장인들이 많다. 세계 꼴찌 수준이다. 최근 온라인 여행사 '익스피디아'가 세계 주요 22개국 직장인 8천687명을 대상으로 물었더니 한국 직장인들의 유급휴가(정기휴가+연차) 실제 사용 일수는 7일로 22위, 최하위를 기록했다. 휴가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업무 때문'(67%)이 가장 많았다. 영국과 프랑스 등 10개 국가 직장인들은 20여 일이 넘게 주어지는 유급휴가를 100% 사용한다고 답했다.
이렇다 보니 휴가를 쓰기 위해 회사에 거짓말을 둘러대는 직장인도 상당수다. 지난해 취업포털 '커리어'가 전국 직장인 447명을 대상으로 물었더니 47%가 거짓말을 한 경험이 있고, 둘러댄 사유로 집안일(55.7%)이 1위, 병원진료(39.5%)가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실은 개인 용무(40.5%)를 주로 봤단다. 2년차 직장인 정모(29'여) 씨는 "내가 아프든지 아니면 가족이 아프든지, 심각하고 위급한 상황이 닥쳐야 휴가를 쓸 수 있다. 여행이나 자기계발은 휴가 사유가 될 수 없다. 내 휴가가 내 것이 아닌 셈"이라고 푸념했다.
◆강제 휴가 보내고, 휴가 수당 아끼고
휴가를 박탈하는 것은 물론 비용도 아끼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기업이 적잖다. 한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곽모(30'여) 씨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이달 1일 회사 내부망에 접속했더니 자신의 올 한 해 연차 사용 일정을 회사에서 임의로 지정해 놓았던 것. 새 공지사항도 떠 있었다. '연차 자동 소진에 적극 협조 바랍니다.' 이에 대해 곽 씨는 "연차 사용 일정을 회사 마음대로 잡은 데다 휴가 당일에 쉬지도 못한다. 실제 휴가를 쓴 것처럼 실적을 조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말에 연차수당을 받을 수도 없다"고 푸념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근로자가 연차를 사용하지 못하면 사업자는 일수만큼 근무수당에 해당하는 연차수당을 줘야 한다. 이를 어기면 사업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원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연말에 남은 연차를 강제로 쓰게 하는 기업도 적잖다. 지난해 12월 여러 대기업과 금융권 기업에서 '겨울철 전력난 극복'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 등의 취지를 붙여 '황금휴가'라는 이름으로 반강제(?)로 권장하며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역시 실은 연차수당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직장인들은 "휴가 선택권을 박탈한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상사 눈 밖에 날까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는 상황이다.
비정규직의 사정은 더욱 안쓰럽다. 인턴직 장모(28'여) 씨는 최근 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질문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직장 상사에게 물어볼 용기가 생기지 않아 이렇게 익명으로 글을 남깁니다. 입사한 지 2개월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인턴도 휴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정규직도 매달 하루씩 연차를 쓸 수 있더라고요. 하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이달부터 회사에 말하고 써도 될까요?"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눈치껏 자제해라'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써라' '인턴이라서 안됐다' 등의 댓글을 남겼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상관없이 근무기간 1년 미만의 근로자도 1개월에 1일씩, 1년에 12일의 연차를 쓸 수 있다. 특히 2007년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되면서 동일 노동을 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과 근로시간은 물론 연차에 대한 차별이 법으로 금지됐다. 이 역시 지켜지지 않는 현장이 많다. 통계청의 2011년 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연차 등 유급휴가 수혜율은 34%로 정규직의 69%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휴가 보장이 삶의 질 높인다
#사례 1
1993년 삼성전자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장기휴가 제도를 도입했다. 최대 100일의 유급휴가를 주는 일명 '리프레시'(refresh) 제도다. 임직원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주자는 취지로 10년 이상 근속자들 중 근무 성적 등을 고려해 인센티브로 줬다. 휴가 기간 어학연수나 해외여행을 원하면 100만원을 휴가비로 지급했다.
다른 삼성 계열사로 확산된 이 제도는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지속되던 2010년 폐지됐다. 그 이유도 생산성 향상이었다. 휴가 일수를 줄여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공격 경영에 나선다는 취지였다.
#사례 2
미국 언론 '월스트리트저널'은 2010년 '휴가 마음대로 못 쓰는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한국기업의 휴가문화를 보도했다. 기사에서는 "한국은 일하는 시간은 길지만 생산성이 낮은 워커홀릭(일중독) 챔피언"이라며 "눈치 보느라 휴가 계획을 제대로 짜고 다녀오는 게 아니라 급작스레 다녀온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글로벌 컨설팅업체 '타워스왓슨'이 지난해 세계 주요 30개국 1천605개 기업을 조사했더니 업무에 몰입하는 한국 직장인은 17%에 불과했다. 중국(53%)이나 인도(48%)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
두 사례는 '생산성'에 대한 우리나라와 세계의 상반된 시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충분한 휴식이 생산성 향상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례는 독일이다. 독일 대부분의 중견기업은 근로자에게 한 달 정도의 여름휴가를 준다. 그러면서 노동과 휴식이 명확히 구분된 문화를 기반으로 장인 정신을 담은 정교하고 튼튼한 독일 제품이 만들어진다는 분석이다.
보장된 휴가를 계획하고 또 기다리며 느끼는 설렘은 일상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피서를 뜻하는 '바캉스'라는 단어가 탄생한 나라인 프랑스는 1년에 5주 정도의 유급휴가를 보장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중 여름휴가를 보내는 데 평균 3주 정도를 쓴다. 연초가 되면 미리 여름휴가 계획부터 잡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그러다 막상 여름휴가를 다녀오면 허무하지 않을까? 남은 휴가 일수를 배분해 다음 휴가를 준비하며 설렘을 이어간단다. 계절마다 방학이 있어 이에 맞춰 휴가도 계절마다 가는 것이 프랑스 휴가 문화의 특징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도 '겉으로' 보장된 휴가 일수는 상당한 수준이다. 법정 공휴일에 정기휴가 및 법적으로 보장된 연차 일수를 모두 합하면 한국 직장인들이 돈을 받으며 당당하게 쉴 수 있는 날은 1년에 30일 정도. 같은 방식으로 계산해보면 영국은 28일, 미국은 25일 정도로 오히려 우리가 더 많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국내의 적잖은 노동 현장에서 자유로운 휴가 사용은 그림 속의 떡일 뿐이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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